오후 4시의 놀이터. 아이는 “꺅” 소리를 내며 곳곳을 뛰어다녔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다고 믿지만, 불온한 생각의 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아이는 아빠의 일탈을 모른 채 신이 나 있었다.
아이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작고 반짝이는 눈으로 놀이터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이런 것까지 관심을 두나 싶을 정도로 사물 하나하나를 응시했다. 넘어져 얼굴에 상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아이 뒤를 바싹 붙어 따라다녔다. 10분쯤 지나자 아직 이른 봄인데도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걷기에 익숙해진 아이는 이제 달리기에 점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비슷한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엄마와 함께 놀이터를 찾았다. 엄마들은 신비한 유대감으로 이내 친해졌다. 그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오후 4시의 놀이터에 등장하는 아빠는 드물었다. 가뭄에 콩 나듯 아이 손을 쥔 채 놀이터를 찾는 남자를 볼 때면 달려가 부둥켜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후 4시의 아빠’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 시도해본 적은 없는 일이다.
불편한 질문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아이가 쪼그려 앉아 놀이터 화단의 풀을 만지작거릴 때, 엉거주춤 아이를 무릎에 앉혀 미끄럼틀을 탈 때, 아이의 따스한 배를 끌어안고 그네를 탈 때, 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유모차에 태워 터덜거리며 집으로 향할 때, 갑자기 떠오른 질문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조용히, 송두리째.
난제였다. 미룰 수 없고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였다. 아이를 돌보는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는 양육자라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행복해지는 동안 정작 자신은 불행해지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이었다. 나락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양육자들이 사투를 벌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나는 전선에 막 도착한 보충병처럼 아직 얼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이 치열한 전쟁의 상흔은 대부분 엄마들의 몫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내의 마음 풍경은 어땠을까. 너무 늦은 물음이었다. 아내는 육아휴직 기간 동안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아이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에만 온통 집중돼 있는 존재와 함께. 아내 자신을 위한 시간은, 철저하게 없었다.
아내는 신선한 식재료를 매일 같이 여기저기서 주문했고, 썰고 갈고 끓이고 삶아서 갖가지 이유식을 만들었다. 사서 고생하지 말고 사 먹여도 된다고 무심하게 던졌던 말들이 되살아났다. 배려로 포장된 무관심의 말을, 아내는 단 한 번도 날카롭게 받아치지 않았다. 받아칠 기운이 없었을 것이다.
늦게 들어오던 날, “여보, 오늘 약속이 있어서”라고 하면 아내는 “응…”이라고 답장했다. 말꼬리는 점점 길어졌다. 점점이 이어진 마침표에 도사린 아내의 마음을,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아내도 나와 같이 불온한 질문을 마음에 쥔 채 괴로워했을 것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 저주 같은 질문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에 근면하게 답하는 글을 써보려고 한다. 그 실마리가 아이와 함께 시간을 정성스레 쌓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아이가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려고 낑낑거리며 작은 손을 내밀 때, 멀리서 나를 바라보면서 초승달 같은 눈매로 웃을 때, 지나가는 강아지에 겁먹고 “아빠”라고 외치며 품에 달려들 때, 그런 선물 같은 순간들 앞에서 질문은 잠시 사라졌다. ‘순간을 켜켜이 쌓아가는 여정에서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직장으로 돌아간 아내와 육아휴직 때의 감정을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아내는 그때 일기를 뒤적거리더니 “그런데 그 시절의 나는 우울하다기보다는 ‘할 수 있다’를 되뇌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속으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라고 계속 채찍질하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웠던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못할 것 같았나 보다. ‘할 수 있어’는 스스로에 대한 명령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는데, 지금 내 마음 상태와 포개지는 말이었다.
육아하는 사람은 해가 쨍쨍할 때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삶을 모래처럼 흘려버리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 출판사 자음과모음에서 만든 ‘시소’라는 책에서 읽은 조혜은 시인의 인터뷰 내용이다. 계절마다 시와 소설 한 편을 골라 담고 작가의 인터뷰를 함께 실은 책인데, ‘모래놀이’라는 조 시인의 시가 담겼다. 놀이터를 갈 때마다 그의 발화가 머리를 맴돌았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웠을 아내의 마음이 떠올랐고,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시간들이 그려졌다.
누구한테도 나를 이해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조차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그러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건 있고, 이루어질 수 있는 관계란 존재하는 걸까.
쓸쓸하면서도 고요한 위로의 말이었다. 마음을 들킨 듯 정확한 문장이라 쓸쓸해졌고, 동시에 글쓰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얻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 역시 글쓰기를 통해 찾아봐야겠다고 오후 4시의 놀이터에서 그렇게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