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배기 아이가 거실 카펫에 앉아 블록을 조립하며 흥얼거리고 있다. 남자는 식탁에 앉은 채 아이를 바라보며 눈웃음 짓다가 소설책을 펴 든다. 커피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고 커피 향을 음미한다. 거실의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평화로운 어느 가정집 오후 풍경이다.
만약 어떤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면, 99.9% 거짓말이라고 보면 된다. 공상과학이거나 초현실주의라면 행여 모를까. 가혹한 아동학대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두 살배기 아이가 클래식을 틀어놓은 채 커피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는 부모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일은, 상상만 해도 감동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육아에는 ‘온오프’ 스위치가 없다. 이 명제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같은 육아의 기본값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면 자꾸 소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얘가 대체 왜 이래” “아빠 지금 너무 힘들어” 같은 말을 하거나, 아이가 울고 있는 데도 멍 때리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들거나. 육아라는 끝나지 않을 듯한 대하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양육자가 아닌 아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나는 현실을 재빨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면서 한참을 헤맸다. ‘애는 원래 이렇고, 아빠는 당연히 힘들다’라고 인정한 채로 다음 수순을 생각할 수 있기까지 두 달 정도가 걸렸다.
육아의 스위치는 늘 ‘ON’이다. 정전은 없다.
아내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육아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산 건 아니었다. 새벽에는 아이 목욕을 시켰고, 퇴근 후에는 열심히 기저귀를 갈았고, 주말에는 함께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 더 많았다. 이를테면 아이의 식사와 간식을 챙기거나 잠을 재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이와 몸으로 놀아줬지만 발달 단계에 따라 놀이에서 무엇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특히 아이의 울음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해석하지 못했다.이건 육아의 핵심이다. 아직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영유아 단계에서는 아이의 신호를 빠르게 이해하고 정확한 대응을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왜 저렇게 우는 거지’하고 주로 생각했다. 아내가 재빠르게 대응하면 신기해하면서 “와, 어떻게 알았어?” 같은 멍청한 소리를 했다. 아내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놓친 게 또 있었다. 아내의 몸과 마음에 이미 일어난, 그리고 일어나는 중인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낮 시간 동안 아내와 아이 사이에는 수차례의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위로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끔씩 “낮에 많이 힘들었지” 정도의 말은 한 것 같다. 그런데 이건 겉치레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은 ‘우상의 황혼’에 나온다. 군대에서 도움이 됐던 그의 말은 육아에선 소용없었다.
주양육자가 되면서 말 그대로 매일 한계를 마주했다. 한걸음 떨어져서 보는 육아와는 차원이 달랐다. 철학자 니체의 격언 중에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집에 가고 싶을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줬던 니체의 말.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는 자꾸만 ‘강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늘 활화산 상태였다. ‘한동안 폭발하지 않겠지’하는 생각은 가차 없이 박살 났다. 한두 시간은 버틸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면 아이 울음소리는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나는 없다. 나는 없다’하고 매일 자기 최면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아이 식사나 간식을 급하게 준비하느라 애먹었다. 배고프다며 울 때 준비하면 이미 늦었다. 그전에 이미 갖춰져 있어야 했다. 이것도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요령이 생기면서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할 놀이도 육아 관련 SNS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수시로 찾아뒀다. 발달 과정에 따라 적합한 갖가지 놀이와 장난감, 그림책 등도 구비했다.
하지만 서너 시간이 넘어가면 서서히 밑천이 떨어졌다. 체력은 어느새 고갈됐다. 자기 최면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이와 하는 놀이는 이미 수십 번을 반복했다. 육아 전문가란 사람들은 아빠에게 주로 “아이와 몸으로 놀아주세요”라고 주문한다. 아이와 몸으로 놀면서 친밀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신뢰감을 얻는다는 설득력 있는 얘기다. 이런 좋은 얘기를 하는 육아 전문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사람들아, 내가 강철부대는 아니잖아. 어제도 2시간 동안 숨바꼭질했어.’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졸음에 빠진 적도 많았다.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뺨을 후려갈겼다. 깜빡 졸음에 빠진 아빠의 직무유기에 아이가 철퇴를 가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읽는데 어느새 눈은 다시 감기고 책 내용과 상관없는 헛소리가 나왔다. 직장 내시경을 할 때 수면 마취하면 무의식적으로 헛소리를 한다는데, 이게 바로 그건가 싶었다. 이미 책 내용을 다 꿰고 있는 아이는 아빠가 엉뚱한 소리를 하면 곧바로 홱 하고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아이는 반쯤 감긴 아빠의 눈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사투를 벌이다 보면 어느새 아내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왔다. 아내가 카카오톡 메시지로 “뭐 좀 사갈까요?”라고 물으면 “아니. 그냥 와요. 지금 즉시 당장”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끝나지 않는 고통에서 나를 건져줄 수 있는 존재는 아내뿐이었다.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주, 몇 달 이어지면서 절로 질문이 떠올랐다.‘아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질문이 시작됐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나는 아내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그때 안 힘들었어?’ 이어 사과하고 고마워하기 시작했다. ‘미안해, 몰랐어.’ ‘자기는 훌륭한 사람이야. 존경해.’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육아서적을 뒤적거리는 일이 많아졌고, 어느새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육아 영상이 부쩍 늘었다. 나의 육아는 이렇게 조금 늦게, 비로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