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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배드파더 May 23. 2022

고집 피우던 아이가 순해졌다

‘전환’의 마법

안방에서 “안 돼”하는 아내의 비명이 들렸다. 아이는 아내의 안경을 양손에 쥔 채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안경이 떨어져 알이 깨져버릴 것 같았다. 놓치지 않는다 해도 안경테가 곧 망가질 것 같았다.

     

아내는 곧바로 달려들어 아이의 손에 든 안경을 붙잡고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안경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안 돼, 이거 놔줘”라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더욱 안경을 세게 움켜쥐었다. 21개월짜리 사내아이의 손 힘은 이미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내는 당황했고, 실랑이가 길어지자 아이는 점점 더 흥분했다.      


나는 아내에게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와”라고 말했다. 안경에서 손을 떼고 아이와 대치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재차 “그냥 나와요”라고 했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아이를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아마 내가 직접 아이의 손에서 안경을 빼앗으며 상황을 정리하길 바랬을 것이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아이는 그때까지 안경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 있던 리모컨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아이는 안경을 손에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아이는 평소에 리모컨 버튼을 꾹꾹 누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내가 리모컨을 들고 입으로 “뿅뿅”하고 소리를 내자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안경은 아빠한테 주고, 리모컨 가지고 놀래?”라고 물었다. 아이는 안경 따위 관심도 없다는 듯 넘겨주더니 리모컨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폭군은 곧 순한 양처럼 잠잠해졌다.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안경을 아내 손에 돌려줬다. 아내도, 아이도 어느새 모두 진정돼 있었다.     


아내는 나를 바라보며 굳이 “어떻게 한 거예요?”라고 묻진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의 행동을 무시하게 했다. 안경의 소유권을 둘러싼 긴장 관계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엄마에게 안경을 뺏기지 않는 일종의 게임을 ‘재밌게’ 하고 있었는데, 김이 새 버렸다. 게임이 끝났으니 안경에 더 이상 흥미가 생길 리가 없다. 그러던 중에 아빠가 갑자기 리모컨이란 새로운 아이템을 갖고 와 다른 게임을 제안하니 안경 따위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나와 아내는 두 돌 전후의 아이에게 “하지 마”라고 지나치게 반응하면 오히려 행동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임상을 통해 경험했다. ‘지나친 반응은 독이다’라는 육아 이론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실제 상황에서의 대응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땐 갈등 상황에 개입돼 있지 않은 제3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도 덩달아 배우게 됐다.     


아내는 상황이 종료된 다음 “만약에 안경이 아니라 칼이었어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라고 물었다.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나는 “정말 위험하다 싶으면 서둘러 개입해야겠지”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물건을 쥐고 있을 때 섣불리 행동하다가 오히려 더 다치게 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나는 “가급적 지나친 반응을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해야 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칼을 두지 않는 것이다.     





“아이의 문제 행동에 지나치게 반응하면 그 행동을 인정하는 셈이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아이가 계속 그렇게 하도록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 NPR 라디오의 과학부 기자인 마이클렌 다우클레프가 쓴 <아, 육아란 원래 이런 거구나!>라는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아이가 부정적인 행동을 할 때 대응 방법 중 대표적인 게 ‘전환’이다. 영유아 시기에는 욕구가 생기면 무조건 직진한다. 이럴 경우 욕구를 막을수록 오히려 욕구가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하지 마’라는 신호가 오히려 자극제가 되는 셈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인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아이의 직진 방향이 위험해 보일 경우 효과적인 여러 대응책 중 하나는 ‘방향 전환’이다. 정말 위험할 경우 “스톱”이라며 멈춰 세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위험하지 않은 다른 방향으로 직진할 수 있도록 틀어줘야 할 경우가 더 많다. 순발력 있게 전환을 잘 시키는 건 육아의 핵심 스킬이다. 나는 그동안 전환의 원리를 잘 알지 못해서 계속 헤맸다. 감정 소모가 컸고 불필요한 갈등 상황도 많았다.     


물론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이 글에서 적은 나의 성공담은 무수히 많은 실패의 연속 속에 나온 희귀한 사례일 뿐이다. 전환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고, 전환을 시도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지쳐 있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건 아이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법이다. 어른의 문법, 어른의 시각으로 대할 때, 아이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이는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끼고 있을까. 이걸 고민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은 채 아이를 무작정 내 뜻에 맞추려고 하니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세계에서 아이의 눈으로 아이를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다. 늘 아내에게 뒤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가끔씩 아내를 넘어설 때가 생기고 있다. 이 쾌감은, 겪어본 아빠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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