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낫배드파더 May 17. 2022

연애할 때도 참은 화를, 아이에 냈다

아내와 10년간 연애하면서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화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낸 적도 없었다. 결혼 후에도 다툰 적은 없었다. 한쪽이 감정이 상해 토라진 적은 있어도, 적어도 이성을 잃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아내는 물론 나 자신도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화내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 알게 됐다.   


제대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비참함 그 자체다. 참고 또 참던 감정이 끓어올라 폭발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발끝부터 감정의 해일이 솟구쳐 오른다, 라고 표현하면 조금은 전달이 될까. 이렇게 화를 낸 다음의 부작용은 몰려오는 자기 연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는 내가 넋 놓을 틈을 주지 않고 곧 보채기 시작한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계기는 하나같이 사소하다. 준엄하게 아이를 꾸짖어야 하는 중대한 경우는 거의 없다. 밥을 먹지 않고 식판에 부어준 미역국에 손을 넣어 휘적거릴 때, 계속 집 밖에 나가자고 보챌 때,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크레파스를 책에 잔뜩 칠해놨을 때,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곱게 개켜 둔 옷을 신나게 헝클어뜨려 놨을 때 등등. 생각해보면 다 별 것 아닌 일이다.     


한 번은 저녁 식사 시간에 계속 우유를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에게 격분한 적이 있었다. 나름대로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식판에 차려줬는데, 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우유, 우유”하고 노래를 불렀다. “밥 먹고 나서 우유 먹자”하고 타이르자 아이는 숟가락과 포크를 던지더니 식판을 엎었다. 잠깐 이성이 탈출한 나는 책상에 놓여 있던 노트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탁’하고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그때 아이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쉴 새 없이 “우유, 우유”하고 외치던 아이는 움찔하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을 바라봤다. 아이는 울지 않았고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찰나였다. 2~3초 정도 됐을까. 아이는 곧 다시 “우유, 우유”하고 보챘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냐는 듯한 표정으로. 이날의 일은 머릿속에 영상으로 고스란히 저장됐다.      




‘나는 아이에게 입힌 상처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다소 이상한 표현이지만, 당시 내가 느낀 걸 문장으로 옮겨놓으면 이렇다. 화를 내고 노트를 집어던지며 아이에게 상처를 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나도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아이와 나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폭력은 정확하게 작용·반작용의 물리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 적이 거의 없던 내게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일은 곧 잦아들었다. 아이가 신경을 곤두서게 할 때면 속으로 넓은 바다를 거니는 범고래 떼를 떠올렸다. 그래도 잘 안 될 때면 생각을 멈췄다.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된 것처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냈다. 쏟으면 다시 담고, 칠하면 지우고, 헝클어뜨리면 다시 정리하고, 안 먹으면 나중에 다시 먹이고 등등. 아이를 집에서 보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상황에 나는 적응했다.


그렇게 평정심을 되찾은 것이라고 믿었다. ‘아, 이제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다’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련은 남아 있었다. 준비하지 않은 상황이 되자 나는 또 실수를 저질렀다. 집 밖에서 아이가 보이는 행동에는 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주말에 가기 좋은 브런치 카페를 미리 찾아뒀다고 했다. 나는 기대에 들떠서 운전대를 잡았다. 그리고 카페에서 작은 참사가 벌어졌다. 아이는 카페 곳곳을 장식한 소품을 흔들고 넘어뜨리고 집어던졌다. 접시에 담긴 음식을 헤집었고,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휘젓고 다녔다.


쏟을까 염려해 치워 둔 커피잔을 아이가 팔로 쳐서 넘어뜨리는 장면을 보면서 감정이 동요했다. 커피와 얼음이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서 소리를 내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평정심을 놀랍게 발휘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크게 짜증이 나 있었다. ‘아니, 쏟을까 봐 치워 둔 커피잔 근처로 가서 굳이 넘어뜨린다고?’     


이후로도 아이는 넓은 카페 공간이 마음에 드는지 신나게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신발을 신은 채 좌석 공간을 올라가려고 했고, 신발을 벗겨놓으면 다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아내에게 얼빠진 표정으로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아내의 선택이 참사를 불렀다고 원망을 쏟아낸 것이다. 참으로 못난 남편에 못난 아빠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점차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화를 내거나 동요하면 아이는 나를 좋은 부모로 여길 수 있을까. 지금이야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곧 내 표정을 읽고 말의 행간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그때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이면 아이는 크게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아빠에 대한 신뢰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막연하지만 아이와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답을 찾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인 나도 이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아마 더 하겠지’하고 생각한다. 나보다 더 한 사람들도 아이를 키워가면서 성숙한 부모로 자라 가니까 ‘나 역시 그렇게 되겠지’ 하고 희망을 품고 있다.    

 

당장 뚜렷한 답을 찾진 못하고 있다. 다만 분명한 건 ‘나의 세계’ ‘아이의 세계’가 만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까지는 도달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나에게 적개심을 품거나 괴롭힐 의도를 갖고 있지 않고, 그저 서툴 뿐이라는 걸 반복해서 의식하고 있다. 이걸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여부는 행동의 차이를 가져온다, 고 지금은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아이와의 접촉은 ‘침범’이 아니라 ‘조우’라는 걸 몸과 마음으로 기꺼이 수용하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이렇게 다들 육아의 고수가 되어가는 걸까.  언젠가 그 경지에 도달하길 바란다.

이전 06화 고집 피우던 아이가 순해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