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필요에 따라 분노를 선택하는 유형의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해왔다. 화를 낸 기억을 떠올려보면 남극에 꽃 피듯 했던 것 같다. 그마저도 '메소드 연기'에 가까웠다. '아, 그다지 화 안 났는데 들키면 어떻게 하지'하고 어색해하며 화난 사람의 말과 표정과 행동을 따라 하는 사람이 나였다. 아내와 결혼 전 10년 간의 연애 동안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진기록은 육아와 함께 와르르 무너졌다.
사회의 불의나 부조리 등 주로 거시적인 문제에 분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괄괄대는 두살배기 아들을 키우면서 쉽사리 분노를 터뜨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화를 참을 수 없는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왜 컵에 우유를 주면 바닥에 쏟는 것인가' '왜 꼭 어린이집 가기 직전에 대변을 보는 것인가' '왜 스케치북이 아닌 마룻바닥에 크레파스를 칠하는 것인가' 하나 같이 미시적인 문제들이다.
힘을 뺄 필요가 없는 주제들에 매번 진심으로 분노했다. 화를 낼 때마다 거대한 자괴감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이렇게 속 좁은 인간이었나'하고 자책하고 반성하지만 분노 폭발은 되풀이됐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점차 커져갔다. 나의 정서적 불안은 아내와 아이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터져 나온 짜증, 우울감, 화, 무력감 같은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는 여과 없이 한 공간에 있는 식구들에게 전달됐다.
한 번은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의사 표시하지 않고 수십 분 동안 계속 울기만 한 일이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 결국 "그만해"라고 크게 소리를 쳤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아이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 섞인 감정에 휩싸여 잠시 멍해졌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방치돼 울고 있었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답을 찾아야 했다. 아내의 어깨너머로 간혹 육아 유튜브 영상을 보던 중, 나의 알고리즘에 <화내고 후회하는 부모를 위한 육아 처방전>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구독 중인 '우리 동네 어린이병원, 우리 어린이' 채널에서 올린 46분짜리 영상이었다. 여기에 나온 박소영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화는 사실 동등한 관계에서 내는 것이다. 우리가 강아지를 키울 때 강아지에게 화를 내면 이상하지 않나. 아이는 아직 미성숙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했다.
박소영 의사는 "(부모들이) 실수하는 부분 중 하나는 내 아이 말고는 만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말을 좀 알아듣는다 싶으면 '얘가 알면서 이러네?'라고 생각하면서 20개월 아이를 5~6세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러면 화가 난다. 알면서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법은 간단했다. 박소영 의사는 "우선 발달단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아이의 발달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내용을 들은 뒤 신기하게도 아이에게 화를 잘 내지 않게 됐다. 소리를 지르는 일은 아예 없어졌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멍하게 있는 일도 줄었다. 가끔씩 감정이 동요할 때가 있지만, 화를 내거나 짜증 내는 일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처럼 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주일 정도.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의 변화였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내용을 스포일러 당한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아무리 극적인 영화라도 반전을 다 알고 나면 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영유아 수준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발달 단계를 거친다. 이는 육아에 어느 정도 참고할 수 있는 모범 매뉴얼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양질의 육아서적이나 교육영상 등 참고자료도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이를 무시하고 경험주의 철학에 입각해 매번 맨땅에 헤딩을 하려고 하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육아의 다이내믹함을 즐기려는 부모라면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권장하지 않지만,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육아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나를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내 안에는 여전히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아이와 관계 맺으며 감지하는 여러 문제들은 결국 내 안에 이미 곪아 있던 문제인 경우가 많다.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소한 문제에 쉽사리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화가 날 경우 해결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분노를 표출할 용기나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참담하게도 대항할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 나는 화를 쏟아냈던 것이다.
인도 태생의 셰팔리 차바리 박사는 '깨어 있는 부모'에서 "부모가 되는 것보다 정서적으로 더 예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여정은 없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셰팔리 박사는 부모가 육아 과정에서 아이에게 짜증과 불안, 분노 등 어두운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이전의 자기 부모로부터 흡수한 정서적 에너지를 재전달하는 것이라고 봤다. 조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그늘이 무의식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자녀에게 때때로 발산된다는 것이다.
그늘의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어두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상황을 탓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영혼 깊숙이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셰팔리 박사는 "감정적으로 발끈할 때는 밖을 보는 게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의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문제를 대면할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셰팔리 박사는 "아이가 감정적인 반응을 유발할 때마다 우리는 정신적 성장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가 된다는 건 우리의 정서적 그림자에 처음으로 환한 조명을 비춤으로써 우리 내면의 민감한 반응을 다스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선물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부모와 아이가 각자 고유의 인생 여정에서 한편으로는 손을 맞잡은 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각자 춤을 추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아이는 여전히 우유를 컵에 부어주면 바닥에 쏟고, 어린이집에 가기 전 똥을 싸며, 스케치북이 아닌 바닥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곤 한다. (최근에는 식탁보나 책장에도 잔뜩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는다. 아이에게 "바닥에 쏟지 말고 천천히 마셔보자" "똥을 쌌구나. 아빠가 얼른 치워줄게" "스케치북 여기 있네. 여기다 아빠랑 같이 그리면 재밌겠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당장 변화가 오지 않아도 좋다. 내가 어른이 됐듯이, 아이도 곧 성숙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탈출구를 아는 미로는 더 이상 미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