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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배드파더 Jul 06. 2022

밥 짓는 일의 고단함, 고귀함

오후 4시가 다가오면 ‘또 뭘 먹여야 하나’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아이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다. 하루에 겨우 저녁 한 끼 챙겨 먹이면서 피로감을 운운하려니 낯이 붉어진다. 하지만 정말 피곤한 일인 걸 어쩌겠나. 이 시간이 다가오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하루 중 가장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아내가 아이를 위해 사놓은 요리책 제목에는 ‘실패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처음에는 제목 따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내 손으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경우가 늘면서 책 제목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이면 돌아오는 심판의 시간마다 가혹한 실패의 경험을 켜켜이 쌓아가면서 말이다.


이 실패는 그저 맛없는 음식에 대한 불평을 잠시 듣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아이는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가차 없이 뱉는다. 먹거나 뱉거나의 ‘제로섬 게임’이다. 어떻게든 아이의 입맛에 맞도록 만들지 않으면 가차 없는 실패를 경험한다. 정성 들인 고백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순간이다.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을 압도적으로 쌓아가고 있다. 비로소 아버지의 “국이 짜다” 한 마디에 짓던 어머니의 나라 잃은 표정을 이해하게 됐고, 아이가 입을 굳게 다문 채 숟가락으로 밥을 휘저으면 눈을 치켜 뜨던 아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됐다. 고통은 지켜보는 것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법. 직접 겪지 않으면 대부분의 것들은 알 수가 없다.


이틀에 한 번 밥을 짓고, 사나흘에 한 번씩 시장이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반찬은 동네 마트, 국은 재래시장에서 주로 산다. 어느새 단골 가게도 생겼다. 아이의 혀에 착 감겨드는 국물을 끓여낼 자신이 없어서 찾아낸 궁여지책이다. 아이는 바지락 아욱 된장국, 황태국, 소고기 맑은 무국처럼 간이 세지 않으면서도 재료의 깊은 맛이 우러난 국을 좋아한다. 전에는 몰랐던 아이의 취향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점차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횟수가 늘고 있다. 스크램블 에그나 호박전을 굽는 수준에서  두부 브로콜리 샐러드, 새우 애호박 덮밥, 닭다리살 야채 간장 볶음, 굴소스 해산물 볶음밥 등의 음식을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전히 실패할 때가 많지만, 간혹 성공할 때면 재빠르게 아내에게 아이가 숟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며 밥 먹는 동영상을 찍어 보낸다.


요리 환경은 열악하다. 아내가 퇴근할 때까지 나와 아이 둘만 집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가 가만히 음식을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야채를 칼질할 때면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며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면 가까이서 보겠다고 달려든다. 그렇게 아이와 사투를 벌이면서 요리를 한다. 독박 육아를 하는 엄마(혹은 아빠)들은 어떻게 견디는 건지 궁금해진다. (다들 어떻게 이걸 매일 하고 있는 건가요?)


팔자에 없던 요리를 하면서 어머니를 자주 떠올린다. 어머니는 늘 요리에 진심이셨고, 식사를 하기 전 냄비 뚜껑을 열면서 “맛없겠지만 맛있게 먹어요”라고 식구들에게 말하셨다. 철이 없을 때는 “맛이 없으면 어떻게 맛있게 먹어요?”라고 되묻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정성 담긴 밥상을 차려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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