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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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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y 22. 2023

진눈깨비

[산문] 백련강 - No. 1

    아버지의 신령의대¹가 바람결에 일렁이듯 넘실거립니다. 청아한 대금 소리를 필두로 천둥 같은 징 소리가 넓게 울려 퍼집니다. 아버지가 몸에 두른 길베²를 펼치면서, 어머니를 위한 씻김굿³의 시작을 알립니다. 순간, 아버지의 어깨 위로 눈송이 하나가 툭 떨어집니다. 아침나절 회색빛이던 하늘에서 연한 진눈깨비가 내려옵니다. 아버지는 형형색색의 신령의대를 벗어던집니다. 신령의대 속에 숨겨진 새하얀 소복이 드러납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제례 의식의 끝을 달리는 사람처럼 초연합니다. 아버지는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구슬픈 가락을 구현해 냅니다. 


    돌아가소! 원망마소! 내 님 가는 길 평안하소!


    아버지의 구슬픈 외마디가 뇌리에 박힙니다. 아버지가 움직일 때마다, 소복 위로 떨어진 진눈깨비가 눈물 자국처럼 짙게 퍼집니다. 할머니는 뭐가 그리 서글픈지, 아버지가 뱉는 절절한 소리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립니다. 아버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죽은 영혼을 달래는 데에만 열중합니다.


    있을 때나 잘하지. 


    나는 중얼거립니다. 하늘이 내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점점 흐려집니다.




    삼일 전, 아버지가 몇 해 만에 현관문을 두들겼습니다. 나와 할머니뿐인 집으로 찾아와, 절에 맡겨야 하는 49재 대신에 씻김굿으로 어머니를 보내주자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버지가 이제는 신령의 화가 가라앉아 움직일 수 있다고, 마지막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보내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복잡한 감정이 머릿속을 떠다녔습니다. 이제라도 어머니를 직접 보내주고 싶다는 아버지를 어떻게 봐야 할지 확신이 안 섰습니다. 나는 잘 지냈냐는 아버지의 말도 무시했었습니다. 

    가는 눈발이 굿판 위로 쉬지 않고 내립니다. 나는 한창 진행 중인 굿판을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를 마친 할머니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옵니다. 


    네 어미가 평안하게 떠난 다는디, 좋은 일 아니냐. 


    할머니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옵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뭅니다. 이제야 어머니를 영영 보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굿판 위의 아버지는 장례식에조차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과 너무도 다릅니다. 그때, 아버지가 내게 다가옵니다.

    

    할머니 말씀대로 기도라도 올리는 게 어떻겠냐.


    별안간 가슴속 응어리진 무언가가 꿈틀댑니다. 




    잿더미처럼 짙은 구름이 공기를 더욱 차갑게 식힙니다. 소낙비처럼 옅게 내리던 눈발이 무겁게 변합니다. 어머니의 영혼을 달래주고 보내 주는 의식이 끝나갑니다. 


    애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할머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냅니다.


    그때 네 애비가 내림굿⁴을 받지 않았다면 너까지 신병이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다 지 자식 지키려다가 저렇게 된 기다. 


    할머니가 내 등판을 두들기며 말해줍니다.

    굿판을 끝낸 아버지가, 신당 뒤편에서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한 손에 들고 옵니다. 아버지는 굿판이 벌어진 멍석 위에 주저앉아,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문 채로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켭니다. 진눈깨비가 이제는 제법 굵은 눈발이 되어 굿판 위로 내립니다. 나는 아버지가 앉아 있는 멍석으로 다가갑니다. 바닥에 나뒹구는 사발 하나를 들어 아버지에게 내밉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들고 있던 사발에 막걸리를 따릅니다. 아버지가 따라준 막걸리를 조금씩 마셔봅니다. 톡 쏘는 씁쓸한 맛이 입 안에 감돕니다. 아버지의 희끗한 머리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갑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버지의 좁은 어깨를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막걸리 주전자를 내려놓은 채 굿판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아버지가 막걸리 주전자를 내려놓은 채 굿판을 공허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함박눈이 흰 꽃잎처럼 천천히 내려와 온 세상을 덮어주고 있습니다. 


1) 신령의대 : 무복. 무당이 굿할 때 신을 상징하기 위하여 입는 의례복.

2) 길베 : 씻김굿에서, 고인이 왕생극락하도록 닦아주는 것.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길 또는 다리를 상징.

3) 씻김굿 : 죽은 이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어 극락으로 보내는 전라남도 지방의 굿.

4) 내림굿 : 무병을 앓아 신지폈다고 믿는 사람이 무당이 되기 위해 하는 입무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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