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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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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y 23. 2023

붉은 노을

[산문] 백련강 - No. 2

    이대로면 병원 유지가 힘들어요.


    수간호사의 목소리가 불이 꺼진 동물병원 안을 떠다녔다. 나는 오늘 들어온 동물들의 차트를 읽어 내렸다. 반려견 2마리를 제외하면 전부 길고양이들과 유기견이었다.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동물병원에 찾아오는 손님은 그다지 없었다. 원장실에 틀어박혀 있는 게 답답할 때면, 거리로 나가서 데려오는 동물들이 대부분의 병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입도 없는데, 요새 유기견들만 자꾸 데려오시잖아요.


    수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수간호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병원을 처음 열 때부터 함께한 수간호사가 괜한 소리를 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책상 구석에 던져놓은 서류 하나를 꺼냈다. 살처분 현장 안내 지침서. 얼떨결에 승낙했지만 수만 마리의 돼지가 죽는 걸 볼 생각을 하고 난 후로는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살처분 현장은 유난히 일당을 많이 지급해 줬다. 다들 꺼려하는 일이라서 그런 거 같았다. 나는 검지로 지침서를 천천히 두들겼다. 나를 쳐다보는 수간호사의 낯빛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우편물로 온 지침서를 내게 건넨 수간호사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은 거 같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유기견들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 나는 지침서를 집어 들었다. 


    저 개들을 살리기 위해서야. 전부. 


    나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질러댔다. 돼지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희뿌연 연기가 돼지가 가득한 흙구덩이에 퍼져나갔다. 돼지들의 비명이 심해질수록 시퍼런 트럭에서 주입하는 가스의 양은 점점 늘었다. 두꺼운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연기가 스며드는 것인지,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꽉 말아 쥐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 정도 각오는 충분히 하고 지원한 자리였다. 나는 수차례 동물 병원에 있을 동물들을 떠올렸다. 갈 곳 없는 길고양이.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기견들.


    다 동물들을 위해서야. 


    나는 같은 말을 읊조리며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스 마취가 덜 된 돼지의 비명소리. 둔탁한 집게차 소리. 여러 소리가 뒤엉킨 채로 흘러와 뇌리에 박혔다. 


    씨발. 재수 없게 왜 안 죽고 기어 나와.


    흰 방호복을 입은 사내가 거칠게 욕을 내뱉으며 구덩이를 비집고 나온 돼지를 거칠게 발로 짓밟았다. 살처분 현장의 작업반장을 맡은 남자였다. 분명 살처분 행동 지침은 정해져 있었다. 신속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몸부림치는 돼지를 마구잡이로 집어서 구덩이로 집어던지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황급히 포크레인 앞으로 달려갔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돼지들이 죽음의 고통을 전부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당장 중지시키세요! 


    나는 노동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때, 돼지들을 짓밟고 있던 반장이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일 귀찮게 하지 마요. 어차피 전부 죽일 거잖아? 


    반장은 퉁명스럽게 말을 뱉어내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 돼지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구덩이로 내던져졌고,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에 가득 찬 돼지들 위로 잿빛 흙이 차곡차곡 덮였다. 


    당신들은 이게 아무렇지도 않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거라고! 


    나는 한 번 더 노동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반장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보호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 반장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의사 양반, 당신은 위선자야. 돈 때문에 여기 온 거 전부 다 아는데, 왜 혼자 유난이야? 저거 다 살릴 수는 있고?


    반장이 나를 툭툭 밀치며 말했다.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반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헛구역질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ㅂ서어났다.




    서서히 피어오른 노을이 발부리에 닿았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돼지들이 묻힌 땅 위에 앉아 있었다. 수만 마리의 생명을 내가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동물들을 위해서야. 전부. 


    내 입에서 튀어나온 뻣뻣한 말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병원에 가득한 유기 동물을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땅에 묻힌 돼지들이 떠올랐다. 돼지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내 주변을 맴돌았다. 흙바닥을 짚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붉은 노을이 돼지들의 새빨간 피처럼 찰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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