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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을 허무는 지극히 사적인 질문

(6) 스토리마이닝은 첫 문턱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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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마이닝은 창작 클래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수업을 통해 글을 써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수강생들이다. 대부분 글을 써보고 싶었으나 아직 발표해 본 적이 없으니 기본적인 글쓰기뿐 아니라 출간의 즐거움도 누리고 싶은 마음에 수업에 등록한다.


모두 내가 처음 만나는 분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이 4주 후에 정돈된 글, 즉 하나의 문학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말이 4주이지 일주일에 두 시간 수업, 4-5명의 또는 소그룹 클래스 또는 20명에 가까운 기관 수업이다. 쓰고자 하는 글이 모두 다르고 대부분 글쓰기 초보자들이므로 강의하는 사람에게는 시간과의 조용한 싸움이다.


그래서 1주 차 수업에서 글감이 결정된다. 본인이 쓰고자 하는 글감으로 쓸지, 또는 내가 다른 글감을 권하고 그것을 쓸지 정해야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무슨 글을 쓸지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경우 강사의 입장에서 직관적인 촉을 발동해서 오고 질문 사이 스토리를 발굴해주어야 한다.


첫 시간에 처음 만나니 서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다. 어색한 인사가 오가고 나면 나는 바로 수강생이 준비한 글감 원고를 화면에 띄운다. 마주 보는 것보다 원고를 같이 보는 것이 서로 부담이 적다.


Y님은 메모 형식의 반쪽짜리 초안을 가져왔다. 만났던 남자와의 추억 이야기다.

"지금은 떠난 사람과의 기억을 쓰고 싶으신가 봐요."

"꼭 그런 건 아니고... 글은 쓰고 싶은데 딱히 글감이랄 게 없어서 생각해 봤어요."

글은 쓰고 싶고, 출간도 하고 싶지만 주제를 정하지 못한 경우다. 이런 경우가 제일 많다. 나는 어찌 보면 식상하지만 가장 스토리 발굴에 적절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전공이나 직업이 가장 풍요로운 스토리 보고다.


"지금은 혹시 어떤 일 하고 계세요?"

"피아노과를 나와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내 수업에 피아니스트가 오다니! 그런데 피아니스트가 프리랜서라니?내심 뭔가 사정이 있겠다 싶었다.

"와, 멋있어요. 전 어릴 때 피아노 선생님 오시면 도망 다녔거든요. 옷장에도 숨고, 침대 밑에도 들어가고.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도 당했어요."

웃음이 오갔다. 서로 조금씩 긴장감도 사라졌다.


Y님의 답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저는 어릴 때 집이 여유가 없어서 너무나 피아노 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고등학교 때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때 피아노 시작하면 늦지 않아요? 그래도 음대 합격하셨네요. 엄청나게 연습하고 입시 매달리셨겠어요. 대단해요."

"맞아요. 어릴 때부터 피아노 하고 음악으로 중고등학교 나온 아이들과 경쟁하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때 IMF가 왔는데 아버지가 사업으로 힘들어하시면서도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게 해 주셨어요."

나는 속으로 아버지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Y 님이 더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잠시 아쉬웠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묻긴 어려웠다.


그때 Y님이 말했다

"아빠를 생각하면 피아니스트로 성공했어야 했는데, 너무 죄송하죠. 음대를 가긴 했는데 제가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연주 활동이 힘들어서 그만두었어요."

"아까워서 어떻게 해요. 그 무대 공포증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데, 그게 그렇게 좋아하는 피아노를 그만둘 정도로 무서운 건가요?"

"피아노를 치러 무대 위를 걸어가잖아요. 그때 제 신발 소리가 제일 무서워요. 관객석에서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요."

그렇구나. 그렇게 무섭구나. 늘 관객석에 앉아있던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포인 것 같았다.


"그런데 피아노만 치셨으면 다른 일을 하기도 어렵잖아요. 피아노를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피아노 학원 선생님을 했어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피아노 하나 보고 버텼는데 계약직인 데다가 4대 보험도 안되고 월급이 너무 적었어요. 아이들과 학부형들 사이에서도 힘들었어요"

점점 나의 타이핑이 빨라졌다.

"아이들과 학부형...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들이 있으셨을까요"

내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한 것은 이 글감이 괜찮은 스토리가 될 것이라는 촉이 왔을 때다. 우아한 피아니스트가 아이들 대상 피아노 학원에서 겪는 어려움이 실감 나게 표현되는 순간 독자와의 점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가 미혼이니까 아이들을 케어하는 게 어려웠어요. 어떤 아이는 일곱 살인데 항상 화장실에서 저를 소리 내서 부르더라고요. 할 수 없이 똥도 닦아 줬어요. 셔틀버스 시간에 맞춰 아이들 태우고, 내려주고.. 그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어떤 학생 어머니가 입시 이론 공부 안 시킨다고 악보를 집어던진 날은 빈 피아노방에서 울었어요."

생각보다 열악한 근무조건이었다. 천사 같은 피아노 선생님들은 피아노만 쳤으니 근로계약서나 이런 현실적인 부분에 어두울 수밖에 없겠지.


다 같이 열을 받아하고 있는 사이 Y 님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날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취업 준비를 해서 제약회사에 들어갔어요. 근데 너무 웃긴 게요... 저는 직원들이 목에 명찰 달고 다니는 게 그렇게 부러웠거든요. 그래서 명찰 달고 구내식당 갈 때 너무 좋았어요. 메뉴도 세 가지 골라 먹을 수도 있고. 그래서 한동안은 너무 행복했어요. 일도 피아노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늘 혼자 있다가 누구랑 같이 일하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그런데"

"그런데요?"

나와 다른 수강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어느새 우리는 Y님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제가 길에 서있다가 자동차가 갑자기 인도를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저런, 저런"

다들 자기들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그때 하필 손가락을 다쳤어요. 그때 병실에서 울었어요. 이제 피아노를 못 치게 되었나 보다 싶어서요."

"아, 정말 피아노를 좋아하셨군요."

"저도 몰랐는데 그때 내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되는 건 죽는 것 같은 고통이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래서요? 빨리 말해주세요."

"그만뒀죠.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요. 그래서 주말 돌잔치나 환갑잔치 같은 데 가서 피아노를 쳐요. 교회도 가고... 피아노만 칠 수 있으면 괜찮아요"

"명찰 아까워서 어째요..."

진지한 분위기가 나의 썰렁한 농담에 빵 터졌다.


글은 첫 시간에 절반쯤 이미 완성되었다. 글감은 발굴되었고. 뼈대도 나왔고 속살만 붙이면 되니까. 내가 Y님에게 물었다.

"남자 친구와의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이 이야기 좋거든요. 우리 써볼까요?"

"네. 써볼게요. 쓸 수 있을 것 같긴 한데...이렇게 말은 해도 글은 못 써서... 노트님이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딱 버티고 자동차 못 들어오게 할게요."


지금 돌아보니 Y 님이 나에게 경계를 푼 첫 번째 고리는 내가 하늘 같은 피아노 선생님 도망 다닌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나를 희화화하거나 가벼운 유머 코드로 상대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글이 <나는 삼류 피아니스트입니다>이다. 이날 이후 나는 돌잔치나 결혼식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분들에게 마음이 간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피아노를 지키는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선입견도 바꾸어 놓은,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글이라 뿌듯하다.


그나저나 그때 나도 피아노 연습 좀 했으면 지금쯤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피아노 선생님, 죄송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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