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정치 깡패 안상구가 흙수저 출신 검사 우장훈과 대낮에 소주를 걸치고 있다. 불판의 삼겹살처럼 지글지글 속이 탄다. 차가운 소주 목 넘김은 불덩이처럼 뜨겁다. 쓴 맛을 인공첨가물로 달큰하게누른 소주, 차갑고 빨리 취할 수 있어 정작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술...... 세상사 화풀이 대상으로 이것처럼 만만한 것이 있을까.
‘언제 소주 한잔 하자’는 말이 ‘언제 식사 한 번 하자’는 말보다 진한 것은 소주잔 너머 오가는 것들 때문이리라. 묵은 정담, 공공의 적에 대한 분노, 거나하게 취할 때쯤 건네는 ‘나에게 몹시 소중한 그 무엇’.
재벌과 정치와 언론 사이의 심부름꾼으로 떨어진 떡밥을 얻어먹으며, 비록 나이트클럽이지만 한 때 회장님이라 불렸던 정치깡패 안상구...... 꽤나 성실했을 것이 분명한 검사 우장훈 본가 마당의 낮술 장면이다. 들개처럼 살았던 안상구가 검사님과 마주한 밥상에서 소주잔 너머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담긴 USB를 번쩍이는 싸구려 십자가 목걸이에서 빼어 건넬 때, 결심이거나 절박함이다.
20년 넘게 호형호제하던 언론사 주간 이강희에게 배신당해 폐인이 되고도 안상구가 우장훈에게 다시 모든 것을 거는 까닭은 대안이 없어서다. 목숨 바쳐 충성했던 이강희가 배신도 모자라 주먹질이 전부인 깡패의 오른손을 잘랐을 때, 안상구는 복수를 위해 남아있는 왼손으로 다시 충성할 대상을 잡을 수밖에 없다.
절박함이라면 우장훈도 마찬가지다. 안상구와 마찬가지로 부여잡을 무엇이 필요한 흙수저라는 동질감이다. 같은 흙수저라도 계급이 있어, 뒤에 ‘검사님 딱지’를 붙이고 있으면 그의 말은 세상이 귀 기울여줄 것이라는 안상구의 믿음에 응대하는 미소는 쓰다.
우장훈은 안상구의 왼손이 건네는 USB를 같은 절박함으로 부여잡는다. 좌천 위기에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었을 때, 그가 충성했던 검찰 보스는 내려다보며 “잘하던지, 잘 태어나던지"라고 했었다. 충성의 대상이 손목을 자른 안상구나 우장훈이나 같은 아픔에 동지가 된다. 그 역시 대안이 없어서다. 우장훈은 안상구와 짜고 부패의 삼각지대인 미래 자동차 회장, 정치인 장필우, 언론인 이강희의 트라이앵글로 교묘히 진입한다.
우장훈은 그들만의 리그로 진입하는 날 양주 한 병을 가져간다. ‘술이 세고 셌는데 무엇하려 가지고 왔냐’는 집사의 질문에 그는 답할 필요가 없다. 도청장치는 두툼한 양주병 뚜껑에나 숨길 수 있지, 세상 욕하며 한번에 돌려 따는 소주병 뚜껑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대통령 당선을 눈 앞에 두고 모든 비리가 폭로되어 범죄자로 추락한 장필우가 넋이 빠져 앉아있는 작은 호텔방에는 빈 소주병 댓 개가 굴러다닌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국회의사당 지붕을 커튼 너머 바라보며 그렇게 장필우는 우아한 양주의 세계에서 지글거리는 소주의 세상으로 온다.
<내부자들>의 냉혈한들은 감정의 영역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 낭만, 우정, 사랑의 자리에 내어주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머쥐어야 할 목표가 있다. 시종 거칠고 더럽고 비열하고 잔인하다.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안온한 감정의 지대가 있다면 안상구가 지애와 만나는 강변의 장면이다.
한때 그가 ‘관리’하던 걸 그룹 멤버였던 그녀는 여전히 남들이 '병신'이라 부르는 안상구를 회장님이라 부른다. 그와 정착하고 싶은 마음과 이글대는 복수에 질주하는 그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안상구 몰래 그를 살리려다 살해된다.
냉혈한 안상구가 잠깐 스치는 눈물을 보이는 지점이다. “우리 몰디브나 가서 모히토나 마실까?” 지상 낙원이라는 몰디브에서 그들이 언젠가 나누었을 모히토는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어둠의 남녀에게 잠시 신기루의 쉼표일 뿐이다.
영화 엔딩에서 출옥한 안상구는 중수부 검사직을 그만두고, 간통 의뢰인과 입씨름이나 하며 지내는 별 볼일 없는 변호사 우장훈을 찾아온다. 허름한 건물이지만 옥상만은 탁 트인 한강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리 모히토 가서 몰디브나 마실까”묻는 안상구에게 우장훈은 무식한 깡패라 하지 않는다.
몰디브가 섬이고, 모히토가 술이라고도 고쳐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주로 트고 양주를 지나 허름하지만 탁 트인 낙원, 단단한 산호의 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