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읽고 있는 책이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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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가가 되지 못한 것이 불행이자 다행이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빨리 읽고 기억하지 못한다. 하나를 천천히, 그것도 맘에 드는 책은 해를 거듭해 반복해서 읽는다. 단단한 와인박스 수십 개를 쌓아 올려 만든 나의 작은 책방에는 오래된 책들이 가득하다. 다 읽은 책을 없애야 새 책을 읽을 수 있건만, 적어도 고지식한 내게 새 책은 옛 책만 못하다.


버트란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학창 시절 영어 시간에 처음 읽었다. 한쪽에는 한글, 다른 한쪽에는 영어로 된 축약본이었는데 하단에 깨알 같이 적힌 단어를 외워 시험을 보았다. 선생님은 심지어 본문을 통째로 외워 읽게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선생님이 왜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시험을 치르게 하셨는지 궁금하다. 홍알홍알한 봄날의 사춘기가 당장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뛰어놀고 싶었지, 행복의 정복에 관심인들 있었을까. 그래도 줄넘기 300번과 동일선상의 목표의식으로 러셀의 책을 모두 외웠다.


지금 생각하니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 종합 영어> 사이 러셀의 책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학창 시절의 축복이다. 그 책은 여전히 내 책장에 있다. 너덜거리는 낡은 책에 수많은 밑줄이 지나갔다. 밑줄을 그은 부분, 몇 겹이나 될까. 펜의 색은 모두 다르다. 대학시절 읽은 후 적어둔 메모, 책 뒤에는 누군지 기억도 안나는 못된 친구들이 장난치고 간 '000 바보' 낙서도 있다.


그 후 삶의 다채로운 통과의례를 거치며 왜 반복해서 그 책을 읽었을까. 읽는 행위로 행복을 정복할 수 있기를 바랐을까. 그 밑줄이 러셀의 단정한 신념에 딱풀처럼 붙어 팽팽한 관성으로 나를 붙들어 매고, 결코 튕겨나가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험 심리였을까. 이유야 어떠하든, 그런 책들은 마치 음식이 뼈와 살을 이루듯, 나의 시간과 기억을 채워 왔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 언어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 아기는 불안정하다. 사물이 각각 이름을 걸고 다가오는 광경은 미지의 도시에 처음 떨어진 이방인처럼 두렵고 낯설다. 늘 나를 지켜보는 미지의 시선을 의식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언어도 변한다. 언어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음색이었다가 서서히 지시와 금기의 원칙으로 대체된다. 온난한 색이었다가 온도가 강할수록 푸른빛을 띠는 불처럼 가혹하게 사춘기를 거쳐 성년에 이르기까지 자아를 각인시킨다.


자애로운 응시와 위로로 출발한 어린 시절의 말이 성장을 거쳐 기대와 감시, 일상적 질책을 동반하며 평생을 머무는 과정에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나 민감성은 절대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성년에 이르러서도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단조롭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어 이상의 함축된 행간까지 클라우드 언어 용량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단어로 둘러 싸여 살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질감과 규모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은 죽음이라는 선형적 완결 서사를 향해 가는 기차여서, 과거의 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맛도 변한다. 모른 채 암기했던 유년기, 머리로 이해했던 청년기, 분주하게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오며 체득한 지혜 사이 스며드는 맛이 있다. 풋과일을 처음 베어 물었을 때를 알기에 익은 맛이 더 달다. 책도 그렇다.


낡은 책장에서 이효석이나 피천득 선생의 글을 다시 꺼내 읽을 때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학창 시절 시험 준비를 위해 외웠던 글들이 낡은 책갈피에서 누워 나를 지긋이 응시한다. 그 글을 교과서에서 처음 읽던 그때로 돌아가 지금의 나를 뒤돌아본다. 교복의 나와 지금의 나는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마른 단풍잎이나 네 잎 클로버가 떨어지거나, 꽂아 둔 것조차 잊고 있었던 누군가의 쪽지가 떨어질 때, 책갈피의 모퉁이에 접어둔 후회와 회한도 있다.

그동안 읽어왔던 수많은 글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돌아본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양날의 검처럼 때로 권력이었고, 때로 언어뿐인 무기력이었다. 내게 남은 몇 권의 책은 벽의 작은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처럼 갈증을 풀어준, 의외로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의 글이었다. 그 사람의 일상, 시선, 반복되는 하늘, 구름, 달과 별, 그 사이의 성찰로 갈증을 풀었다. 다시 꺼낸 그 책은 나와 나란히 걸으며 성장을 돌아보게 했다. 글쓴이와 읽는 이를 함께 비추는 글이었다. 더 나이를 먹고, 하나의 단어에 한 없이 길게 머물며, 긴 밤 한 문장에 머물 때, 어쩌면 온전히 그 책을 읽었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꿈꾸어온 안온한 지혜와 평화에 잠길지도 모르겠다.


절망적인 시절에도 아이들은 풍선을 들고 달린다. 행복의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나의 개인적인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동안 무수한 글의 위로로 살아왔기에 나도 그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새 문서의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행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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