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전철 맞은편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엄마가 앉아 있었다. 아이도 엄마도 가만히 앉은 자세 그대로 앉아 가고 있어서, 외국인인가 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의자에 신발을 신은 채 올라가거나 창밖 풍경에 이리 저리엄마와 이야기를 주고 받을 법도 한데, 둘다 무척 조용해서다.
아이는 맞은편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다른 쪽을 보고는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다가 엄마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아 살며시 내리더니 자그마한 얼굴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무릎에 들고 있던 작은 라탄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요즘은 티슈를 손쉽게 구해 손수건을 잘 쓰지 않는데, 깨끗하게 다림질한 손수건이었다.
아이는 손수건을 가지고 놀라울 정도의 경우의 수로 놀았다. 제 주먹을 넣어 감싸기도 하고, 돌돌 김밥처럼 말기도 하고, 리본을 매어 손목에 감기도 했다. 삼각형으로 접어 머리에 쓰자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종착역까지 가는 삼십 분 동안, 아이는 손수건 하나만 가지고 놀았다. 엄마는 나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짓고는 입모양 만으로 소리 없이 말했다. '미안해요.'
언젠가 여행가 한비야가 늘 흰 천을 끊어 다닌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땀이 나면 수건으로, 물건을 넣는 봇짐으로, 더위에 머리를 감지 못하면 터번으로, 별빛 아래 노숙할 땐 홑이불로, 나무에 연결해서 해먹으로, 개울물에 빨아 널면 금세 마르는 기특한 여행가의 소품...... 엄마는 작지만 큰 손수건을 건넨 것이다. 귓속말이 상대에게 불편할 수 있음을 알고 아이를 나무라는 대신, 상상력의 장난감을 재빨리 손에 쥐여준 엄마였기에, 나는 그녀의 작은 가방에 또 어떤 물건이 들어 있을까 궁금했다.
가방이라는 것의 외양만이 왜곡되고 과장되면 씁쓸하다. 그것이 부의 척도, 사랑의 잣대, 자존감의 기준이 될 때 특히 그렇다. 그 가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는 그 안의 물건들이 말해준다고 생각하니까.
단정한 백발의 노신사가 골동품에 가까운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걷는 모습은 품위 있다. 길들여온 시간만큼 헤진 가방이다. 자식들 집으로 가는 길, 정성스러운 먹거리를 들고 걷는 어머니의 양손 짐보따리는 가방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없다. 직장인들의 백팩은 이제 양복과도 낯설지 않다. 출퇴근에 자기계발까지 화이팅 스피릿, 힘 내시라! 소풍날 아이들의 개나리 빛 가방은 앙증맞은 몸에 비해 크지만, 엄마가 새벽잠 대신 별을 넣어 싸준 김밥이 함께 달린다. 시험 점수가 몇 점인지 기억도 못 하고 농구하고 돌아와 바닥에 던져둔 중2의 책가방도 나름 쉬크하지 않은가.
누군가 문득 가방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릴 때, 적어도 종착역까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상상해볼 만한 물건이 나와주기를 기대하며 전철을 타곤 한다. 내 가방의 물건은 어떤 나를 보여줄지 알지 못한다. 그 가방이 외양이든 내면이든 나의 지나온 날들과 그릇의 크기를 넘지 않는 고만 고만한 정도이리라. 깨끗하게 풀 먹여 다린 손수건 하나도 이제 가지고 다닐까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