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에게 잡일이 몰리는 이유 : 뉴비의 착각
착각하지 마! 날 편하게 하는게 너의 일이야!
처음 회사에 가면 팀 선임들이 잘해준다. 딱히 나쁜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이제부터는 프로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프로의 세계란 별 게 아니다. 돈 받고 일하면 그게 프로다. 그래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기도 한다.
오피서가 되기 전까지 사회가 원하는 고등교육도 충분히 받아왔다. 약육강식의 차가운 취업 경쟁시장에서 당당히 선택받았다. 선배들 자리나 내 자리나 다 똑같은 모양으로 생겼다. 이내 내가 저들과 같은 클라스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처음이라 약간은 미숙할 수는 있겠지만, 곧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임들은 신입사원에게 그럴싸한 멋진 일을 주지 않는다. 팀장님은 차근차근 잘 가르쳐주라고 했지만, 선임들은 여유가 없어 보인다.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표출하고자 도와드릴 거 없냐고 물어봐도 반응들은 고만고만하기 마련이다.
시키는 건 보조 수준의 일이다. 자료 서칭, 계산서 처리, 스케줄 확인, 서류 정리.. ‘아! 하나 더 있다. 도시락 배달 주문! 이거 중요한 일이라고 했는데.. 하아..’
딱 봐도 거지 같은 잡일이다. 이것들이 잡부를 뽑은 건가? 도시락 주문 맛깔나게 하면 승진시켜 주냐? 처음에는 잘 몰라서 그냥 한다. 한 달 정도 지나면, 괴리감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한다.
당초 생각했던 것은 전혀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
체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팀 내 업무들을 안내 받는다. 매일 선임들은 돌아가며 전문적인 업무 교육을 시켜준다. 실제 진행 중인 업무에 극적인 순간 게임 체인저로 투입된다.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선임들과 손발을 맞춰가는 모습을 상상해 왔다. 떠오르는 당찬 신예의 모습! 그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째 일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들만 준다. 처음에는 자료 프린트나 서류 정리 같은 일만 받아도, 보다 퀄리티에 신경 쓰며 남 다르게 해 본다. 그러나 별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반복되고 곧 자괴감이 든다.
선임들이 제대로 된 업무를 주지 않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현실적이고 이기적이며 심리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현실적 : 신입을 시킬 수 없는 현실의 이름. 배려.
선임들은 이미 신입 레벨을 겪어봤다. 단위 업무를 통째로 맡기면 말아먹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업무를 망쳐버리면 아직 튜토리얼 기간인 신입사원에게는 면책특권이 있다. 그 책임은 오롯이 선임에게 돌아간다. 혼나고 뒷수습할 것까지 미리 예상되기 때문에 쉽게 일을 시키지 못한다.
또한 촉법소년과도 같은 신입사원 입에서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선임들은 윗선에 소환되어 탈탈 털리게 된다. 신입사원이 고통을 호소하면 오피스 게임에서는 일단 반칙부터 불고 본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신입사원의 능력 부족과 선임들의 눈치 보기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이를 회사는 문화적 표현으로 '배려'라고 한다. 굳이 배려하지 않아도 어차피 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회사는 신입사원에 대한 배려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이기적 : 시간과 노력의 한계
선임들은 신입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이미 중요한 실무 중인 선임들은 시간과 노력을 쏟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선임 입장에서는 당장 해야 될 업무를 제쳐두고 신입사원 코칭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신입에게 문제없을 만한 잡일을 던져놓고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까? 이렇게 두 가지만 놓고 생각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차갑고 냉정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함께 일한다 하더라도 똑같이 월급 받는 남이다. 신입사원 잘 가르쳐봐야 당장 그 선임 일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 회사는 이런 여건까지 배려해 주지 않는다. 신입을 팀에서 잘 성장시키라는 말만 할 뿐이다. 그리고 팀장은 이를 그대로 선임들에게 지시한다.
선임들의 기대감은 단 하나. 신입이 어서 일을 덜어가 내가 편해지면 좋겠다는 것이다. 다만 신입을 성장시키는 선임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해야 하는 업무량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신입사원의 성장이 늦을 경우 선임들은 어떻게든 이를 신입사원 탓으로 전가시킬 수 있다. "계속 가르치고 있는데 신입이 잘 못 따라오네요." 이런 식이다. 그러나 자신의 업무에 내놓은 구멍을 신입사원은 메꿔줄 수 없다. 팀의 다른 동료들도 절대 메꿔주지 않는다. 그 망한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또한 자신이 잘 가르쳐 놓은 신입사원이 꼭 내 업무를 덜어간다는 보장도 없다. 이건 팀장이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팀장의 말은 종종 바뀐다.
선임들은 경험상 이 암묵적인 룰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서로 하기 싫은 것이다. 다만 시간을 벌고자 신입사원에게는 천천히 하라고 둘러댈 뿐이다.
심리적 : 자기 자신의 투영
주요 실무를 담당하는 대리, 과장 중 신입 시절 업무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어디 가서 귀인을 만나지 않은 이상.. 거의 없을 것이다.
쌍팔년대도 아닌 현대 사회에서 일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쌍팔년대에는 도제식 문화라도 있었다. 일단 멱살 잡고 딜부터 넣는다. 패서라도 가르친다. 알 때까지 팬다. 확실하게 익힌다. 차라리 이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쌍팔년대 오피서들은 모두 은퇴했거나 이미 물갈이 당해 더 이상 회사에 남아있지 않다.
문명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세상의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회사는 더 많은 돈을 벌고자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 회사 안팎의 개인화는 이미 일상이 되어 있다. 이 가운데 회사는 사람 넣어주며 알아서 적응하고 알아서 가르쳐 쓰라는 식이 되는 것이다. 회사에게 신입의 성장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신입사원을 가르쳐야 하는 선임들도 제대로 일을 배워본 적이 없다. 이 대목에서 자신의 라떼를 투영하게 된다. 뭐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잘 모른다. 체계적인 커리큘럼 같은 건 더더욱 만들어 본 적 없다. 그래서 짬짬이 시간 날 때마다 매뉴얼 정도 알려준다. 그 다음 모르는거 물어보면 대답 정도 해 준다.
실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를 알려줄 때는 그냥 자신들이 참석하는 회의에 데리고 간다. 분위기 익히고 내용들 유심히 보라며.. 뭘 익히고 봐야 하는지 사실 자기들도 모른다. 신입사원은 회의 중 뭔가 한 마디라도 해 보고 싶지만, 아는게 없어 이조차도 쉽지 않음을 직감한다. 분명 같은 나라 언어지만 외국어 같이 느껴진다. 현타는 또 다시 찾아 온다.
이 현상의 원인은 크게 특별한 이유가 없다. 부서 선임들이 오피스 게임을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회사의 시스템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도 배려가 없다. 회사는 개인의 숙련도라는 스킬셋을 고려하지 않는다. 인건비가 나가고 있으면 그냥 1/n인 것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팀이라는 울타리 안 수많은 무리들 속에 던져버린다. 신입에게는 선임들에게 많이 배워 열심히 하라고 말한다. 팀장에게는 신입 뽑아줬으니 팀 업무에 도움 되게 잘 육성해 보라고 한다.
수단이나 방법은? 그런 건 없다. 알아서 하는거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알아서 잘하는 것을 '리. 더. 십.'이라고 뻔뻔하게 용어 써 가며 정의하는 것이다. 당연히 신입사원은 괴리감과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선임들은 역할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일단 울타리 안에 던져지면 스스로 생존하고 알아서 레벨을 높여가야 한다. 누가 챙겨주는 건 없다.
이것이 차가운 오피스 게임 초기의 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