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전공의 이야기 (7)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전공의 이야기 (7)
성탄절이 가까워 오니 내 생애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은 성탄절이 생각난다.
어려서 부터 교회에 다니던 내게 성탄절은 언제나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철부지 꼬꼬마 시절, 일 년 내내 고깃국을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내게 성탄절은 뜨끈하고 얼큰한 고깃국을 먹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성탄절에 공연할 연극이나 노래 연습을 하곤 했다.
새벽송을 돌러 가기 전에 늘 하던 우리교회 만의 의식이 있었다.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새벽 일찍부터 큰 가마솥에 소고기국을 끓여서 하얀 쌀밥과 함께 내어주시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소고기국이 무척이나 귀해서 일년에 몇 번 먹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다. 나는 교회 난로가에서 고슬고슬한 흰 쌀밥에 얼큰하고 뜨끈한 그 소고기국이 너무 기다려 졌다. 그래서 내게 성탄절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뜨끈한 소고기국과 어둠속에 소담스런 촛불처럼 따스하고 환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거의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성탄절 새벽에는 창호지로 만든 별모양의 등 속에다 촛불을 세워 밝히고 교인들 집을 찾아 다니며 축복의 캐롤송을 불렀다. 그러면 기다리고 있던 교인들은 과자며 고구마며 사탕같은 맛난 음식들을 산타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한 겨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새벽 어둠 속에 별빛을 따라 다니며 간식거리를 받아오는 것은 참으로 따스한 경험이었다.
전공의 일년 차가 거의 끝나 갈 무렵이다. 한 두 달만 지나면 내게도 후배가 생기고 입원환자를 전담하는 전공의 임무가 끝나게 될 터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환자분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재활치료를 받도록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지내온 풋내기 전공의 일년차가 이제 환자보는 개념도 생기고 조금은 의사스러운 티가 나는 무렵이었다.
성탄절 시즌이 되면 병동도 왠지 좀 더 평화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병동 여기 저기 반짝거리는 불빛도 있고 병원에도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져 있어서 그런 걸까? 성탄절과 병원은 그 특성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짝이 잘 맞는 조합같은 느낌이다.
성탄절이라고 해도 일년 차 전공의인 내게는 여느 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늘 회진해야 하고 당직을 서는 것도 똑같다. 그렇지만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에 괜시리 나는 살짝 흥분도 되고 기분이 참 좋았다.
4년차 선배님은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로 가고 없었다. 의국에는 나를 포함해서 3명 뿐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아빠 없이 성탄절을 보내고 있을 4년차 선배님네 아이들이 신경이 쓰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첫째가 초등 1학년이고 둘 째는 두 살 정도 터울이 있었다. 그래서 병원 앞 문방구에 가서 산타 모자와 수염, 산타복장, 산타 주머니 등을 샀다. 아이들에게 줄 과자 종합선물세트도 샀다. 그러고 보니 3년차 선배님 아이들 생각이 나서 선물을 몇 개 더 샀다.
아빠가 공부하러 가고 없는 집 아이들이 산타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생각하며 아이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떠올리니 저절로 나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4년 차 선배님 부인께 제가 찾아갈테니 넘 놀라지 마시라고 귀뜸을 해 두었다. 성탄 전날 2년차 선배님께 병동 콜을 좀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밤에 4년 차 선배님 아파트를 찾아 갔다. 아파트 계단에서 싸들고 온 종이가방에서 산타복장을 꺼내 입고 수염과 모자까지 하고 나니 내가 진짜 산타가 된 듯 하여 너무 기분이 좋았다. 초인종을 누르니 선배님 사모님께서 나오셨다. 눈을 찡긋하고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아이들을 부르신다.
얘들아, 이리 와 봐. 산타할아버지가 오셨어~"
아이들은 내복 바람으로 우당탕 거리며 현관으로 뛰쳐 나왔다. 내복입은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다. 과자 선물세트를 하나 씩 건네주며 아빠가 공부하러 가계시는 동안 둘이 사이좋게 잘 지내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더니 첫 째가 아빠가 공부하러 서울에 간 줄을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다. 산타는 원래 모르는 게 없다고 너스레를 떨며 얼른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이제 3년 차 선배님 댁으로 갈 차례다. 이 집 아이들은 둘 다 여자아이들이었는데 선배님을 닮아 올망졸망한 눈망울이 엄청 귀여운 아이들이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사모님이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과 함께 현관으로 나오셨다.
우와~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네~
아빠가 병원일로 늘 바쁜데도 둘이 사이좋게 잘 지내기 때문에 주는 거라고 하며 현관을 뒤돌아서 나오는데 첫 째 딸이 수염으로 가리긴 했지만 내가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어? 산타할아버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등 뒤로 그 얘기를 들으며 굴뚝 대신 엘리베이터에 얼른 몸을 실었다. 그러고 보니 3년 차 선배님 아이들은 가끔씩 병원으로 아빠를 찾아 왔던 적이 있어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집 아이들에게 가야하는데 들키지 않으려면 안경을 벗어야 되겠다 싶었다. 조심스레 초인종을 누르니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 둘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여인이 나를 반겨주었다.
우와~ 산타다~
나는 두 아이들을 꼭 안아 주었다. 짐짓 굵은 목소리로 아빠가 병원일로 바빠서 집에 자주 오지 못하는데도 할머니와 엄마 말씀 잘 듣고 사이 좋게 지내서 주는 거라며 과자 선물세트와 장난감을 빨간 산타 가방에서 꺼내 주었다. 좀 더 있고 싶었지만 2년 차 선배님이 대신 당직콜을 받고 있었던 터라 얼른 돌아섰다. 그 후로도 한 참 동안 우리 아이들은 산타가 정말로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다. 왜냐하면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까... ㅎㅎ
계단에서 얼른 다시 산타복을 벗어서 가방에 넣고는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 안에서 병원으로 오는 도중에 환자들 생각이 났다. 나 혼자 이렇게 성탄기분을 내는 것이 뭔가 허전하고 그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환자들에게도 성탄절의 이 따스한 느낌을 전해 주고 싶었다.
https://youtu.be/W7rbPQBvn40?si=w5cqRRAUPAy_P4Un
의예과 시절에 친구들과 마치 문화교실처럼 다같이 본 영화가 있었다. "패치 아담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헌터아담스라는 괴짜(? 내 마음 속에서는 진짜!)의사가 의사가 되기 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환자란 무엇인지, 의사란 무엇인지, 치료란 무엇인지에 대한 뿌리 끝까지 들어가 그는 질문한다. 그래서 그는 의대생 신분으로 엄숙하고 딱딱해져 버린 병원의 분위기를 깨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아암 환자와 웃음을 잃어버린 많은 환자들에게 웃음과 사랑을 전하며 차가운 의학지식에 온기를 더한다. (나는 #면역결핍 보다 더 심각한 현대인의 질병을 #웃음결핍 이라고 생각한다. #ASDS : Aquired Smile Deficiency Syndrome.)
이 때 성탄절 전날 내가 느꼈던 감정은 패치 아담스의 마음과 겹쳐지는 것 같다. 병원 근처 문방구 앞에서 택시를 멈췄다. 50여 통의 성탄카드를 사가지고 병동으로 들어왔다. 내가 돌보고 있던 환자들이 그 정도 되었다. 잠든 환자들을 한 번 둘러 보고는 병동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뒤져가며 그들의 내년도 치료 목표를 정리했다. 어떤 할아버지에게는 내년에는 지팡이를 놓고 걷는 것이, 어떤 할머니는 콧줄을 빼고 입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내년도 재활치료의 목표였다.
늦은 밤 카드를 가지고 숙소로 들어왔다. 이미 성탄절 새벽이 된 것이다. 약 세 시간 정도에 걸쳐서 환자들 모두에게 카드를 썼다. 성탄인사와 새해 재활치료 목표를 함께 적어 넣었다. 그 날 밤에는 신기하게도 병동에서 콜이 한 번 도 없었다.
성탄절에는 그 큰 병동에 재활의학과 의사라고는 나 밖에 없다. 과장님도 휴일이니까 나오지 않으시고 선배들도 그 날은 출근하지 않아서 아침 일찍 회진을 돌지 않아도 된다. 새벽까지 카드를 쓴 터라 나도 느긋하게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몸 단장을 했다. 처음에는 가운 대신에 산타복장을 하고 회진을 하려고 생각했다가 환자들이 못알아 볼 것 같아서 가운만 입고 머리에 빨간 산타모자를 쓰고 환자들에게 주려고 써 둔 성탄카드를 빨간 주머니에 가득 넣어서 둘러 메었다. (지금 돌아보니 패치 아담스처럼 코에 빨간 관장용 고무주머니를 끼었다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
그렇게 빨간 모자에 빨간 주머니를 들고 병동에 나타나니까 간호사들은 웃고 난리가 났다. 나도 뭐 좀 어색하긴 하지만 재미있었다. 가장 상태가 안 좋은 분들이 있는 방부터 하나 하나 회진을 돌면서 새벽에 써둔 카드를 건네었다.
내년에는 꼭 휠체어 없이 걸어 봅시다.^^
생전 처음 의사에게서 받은 성탄카드. 환자들은 너무도 좋아했다. 콧줄을 끼고 말을 할 수 없는 분들도 눈빛 만으로도 좋아하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환자들의 그런 눈빛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평소보다 더 길고 평화롭고 느긋한 회진이 끝난 뒤에 스테이션에 앉았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느낌... 나 스스로에게 참 뿌듯했다. 회진하는 동안 환자들의 선한 눈빛을 보며 피곤도 싹 가셨다.
카드 값과 선물, 산타 복장 등으로 약 15만원 정도 쓴 것 같다. 카드를 쓰느라 세 시간 정도 잠을 아꼈다. 그렇지만 내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성탄절 스토리가 생겼다. 세시간의 잠과 15만원으로 이것보다 값진 것을 살 수 있을까? 십오년 남짓 지났지만 그 해 성탄절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이 아침, 그때 그 환자들의 기쁨과 설레임이 어우러진 눈빛이 다시 생각난다. 이런 것이 행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