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우리 학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애였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그 애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그렇듯, 우리 반에는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들 천지였다. 나보다 작은 몸집에 앞으로의 성장을 대비해 그들의 엄마가 고른 게 틀림없는, 두 사이즈는 커보이는 교복을 포대자루처럼 뒤집어쓴 애들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H는 달랐다. 독보적으로 큰 키,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좋은 성적, 심지어 운동도 잘했다. 성격까지 좋았으니 말 다했다. H는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서열법칙에 따라 학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애였고,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티는 안 내지만 은근히 모두가 좋아하는 애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 H와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나는 H와 등수를 다툴 만큼 성적이 좋았던 것 외에는 (H가 나보다 조금 더 잘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는 애였다. 같이 어울려 다니는 그룹은 있었지만 내 존재감은 유령처럼 미미했다. 그리고 시험기간에 노트를 빌려갈 때만 짙어졌다. 그냥, 그 정도의 그럭저럭인 애였다. 우리는 아마도 서로 모르는 문제를 묻다가 가까워진 것 같다. 나는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과 체육이 약했다. 체육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가망이 없었지만 수학은 노력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시험을 앞둔 어느 날 자습시간,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위권 아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자율적으로 공부 따윈 하지 않고 있었다. 시끄러운 교실에서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수학문제와 씨름하다가 결국 H에게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학은 나에게 불가해한 언어다. H는 내가 보여준 수학 문제를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날 칠판 앞으로 잡아끌었다. 당황한 나는 작은 목소리지만 재빠르게 불만을 그애의 귀에 내리꽂았다.
"야! 뭘 칠판 앞까지 나오고 그래? 창피하게."
그때 H가 내게 큰소리로 외쳤다.
"야 이보나, 모르는 건 창피한 게 아냐!"
순식간에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모르는 건 창피한 게 아냐, 나는 그 말이 무척 고마우면서도 원치 않는 관심을 받게 되어 당황스러웠다. 나는 유령처럼 미미한 내 존재감에 만족하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과의 교우관계는 눈밖에만 나지 않으면 충분했다. 그보다 내가 관심 있는 쪽은 선생님들의 눈에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H와 나, 다른 여자애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생겼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한 명의 남자애, 한송이가 끼어들었다.
사실 이건 H가 아닌 한송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한송이 이야기를 하자면 H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송이는, 말하자면 H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 애는 일단 작았다. H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면 한송이는 딱 그만큼 작았다. 얼굴은 밤톨 같았는데 눈이 인상적일 정도로 크고 짙었다. 한송이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애는 아니었다. 성격도 까불거렸다. 초등학생처럼 여자애들한테 장난을 걸었고, 그 대상엔 나도 포함이었다.
'모르는 건 창피한 게 아냐' 사건이후, 시간은 흘러 드디어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다. 중학교 시험은 하루에 세 과목씩 봐야 하는게 힘들었지만, 어린 만큼 체력은 좋았으니 나는 늘 시험 전날에는 밤을 샜다. 각성 상태를 유지하면 오히려 아침에 정신이 또렷했기 때문이다. 시험공부가 성공적이라면 보통 새벽 3시쯤 마지막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날의 마지막 과목은 한문이었다. 막 한문 책을 펼치고 글자들을 훑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진동했다. '시험공부 생존신고'를 하는 친구들의 문자메시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생존신고도 아니었고 문자메시지도 아니었다. 그건 한송이가 건 전화였다.
새벽 3시에? 우리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나는 가족들에게 들릴까 봐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미쳤어? 새벽 3시야, 지금!"
"어, 이보나. 나 한문 좀 가르쳐줘."
"그거 때문에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엄마 아빠 다 잔단 말야."
"한문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고. 너 공부 잘하잖아. 가르쳐줘."
한송이는 쉽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문을 어떻게 전화로 설명한단 말인가? 나는 일단 대충 들어주는 척을 하고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뭘 모르겠는지 말해 봐."
"그냥 다 모르겠어."
"...뭐? 그럼 내가 어떻게 가르쳐주는데? 야, 끊어. 나 공부해야돼."
너무 냉정하게 말했나 싶어 수화기 너머로 한송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조금 마음이 상했어도 이 정도면 전화를 끊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어진 한송이의 말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이보나, 넌 H가 그렇게 좋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H를 좋아해? 그 사건 이후로 H와 더 가깝게 지내고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기브앤테이크 같은 관계지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한송이는 왜 이런 걸 묻지? 나는 겪어본 적 없는 당황과 혼돈에 빠져들었다. 국영수, 사회, 과학, 도덕, 한문, 컴퓨터 등등 모든 과목의 답은 언제나 명료했고 그중에서도 평균 90퍼센트의 확률로 맞는 답만 고르던 내가 한송이의 질문에 '대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말문이 막힌 내게 한송이가 대신 말을 건넸다.
"5시에 학교 앞에서 만나. 같이 한문 공부하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가 심각하게 없다. 특히 누군가 나에게 가지는 호감은 더욱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니 그건 내게 매우 뜬금없는 제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를 가르쳐주면 나도 공부가 되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기어이, 깜깜한 새벽, 교문 앞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 시간에 교문이 열려 있을 리가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던 우리 둘 중 먼저 움직인건 한송이였다. 한송이는 가방을 벗더니 교문을 잡고 훌쩍 뛰어올라 학교 안쪽에 착지했다. 몸집만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나는 순간 너무 허술한 게 아닌지, 학교의 보안체계를 걱정했던 것도 같다. 한송이가 교문을 열었다. 나는 그애의 가방을 들고 교문을 통과해 나란히 걸었다. 막상 만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학교 어두울 때 오니까 좀 무섭네."
"그러게."
그 말을 마치고 한송이는 갑자기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한송이의 가방을 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외쳤다.
"야이 한송이 새끼야!! 치사하게 나만 두고 가냐!!"
그때였다. 계단에 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한송이는 나보다 먼저 어둠 속을 달려가 내가 올라올 길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밝은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생각했다. 어두운 계단을 둘이 걷는 것과, 밝은 계단을 혼자 걷는 것, 둘 중 뭐가 더 나은지.
깜깜한 교실에서 같이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한송이가 불을 켜려고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의 빛이 교실을 물들였다.
"보나야, 이 문제 시험에 나올 것 같지 않냐?"
"응, 그러네."
우리는 그날 3교시에 한문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내 머릿속은 시험 결과보다 한송이가 한 행동들로 가득차 있었다. 맹세하건대, 이 모든일을 겪고도 혹시 '한송이가 나를 좋아하나?'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했던 나의 뇌회로는 그 일을 잊었다. 한송이도 그후로는 나에게 장난을 걸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졸업을 했고, 졸업 후에 단 한 번도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동창 중에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건 한송이다. 너 그때 나 좋아했지? 이거 알아채는데 거의 20년이 걸렸어, 라고 말하면 그애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송이의 반응에 상관없이, 나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밝은 계단을 혼자 오르는 것보다 어두운 계단을 둘이 오르는 게 좋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