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언니들이 좋았다. 나보다 1년이라도 더 살아본 언니들은 뭘 해도 어른 같은 티가 났다.
한 살 차이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음악방송에 나오는 댄스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부르는 척'만 한다는 걸 알려준 건 윗집 언니였다. (지금은 라이브가 일반화되었지만 그 시절엔 거의 대부분 립싱크를 했다.) 그때 나는 충격을 너무 크게 받아서 윗집 언니의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끝내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데, '언니'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절대적 충성심과 신뢰도 때문이었다. <웨딩피치>에서 피치, 릴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데이지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사람도 윗집 언니였다.
"언니, 난 데이지가 별로야. 릴리가 제일 좋아."
"왜?"
"릴리는 머리도 길고 목소리도 좋아서 공주님 같잖아. 그런데 데이지는 머리가 짧아서 싫어. 성격도 남자 같아."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이없는 이유이지만, 그땐 내 또래 평범한 여자아이들처럼 얼굴도 예쁘고 심성도 착한 공주님을 동경했었다.
"그런 이유로 데이지를 싫어한다니 너 아직 어리구나? 머리가 짧으면 공주님이 될 수 없니?"
윗집 언니가 이 말을 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앞에서 쓴 립싱크 사건보다 더 컸다. 여자아이는 왜 머리가 짧으면 안 되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동경하고 이상적으로 그리던 공주님 같은 여성상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그때부터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남동생만 있는 내게 언니들을 좋아할 이유는 양손가락을 동원하고 양발가락까지 모두 펴봐도 넘치게 많았다. 엄마한테 언니를 낳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고 초등학교 때 다닌 논술 학원의 대학생 조교 선생님에게는 '저의 언니가 되어주세요'라는 수줍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주위에 언니들이 많다. 언니들은 언제나 나를 다정하게 이름으로 불러주고,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고, 업계 선배로서, 때로는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언니라면 역시 L언니다. L언니는 처음으로 오로지 나를 위해, 나 때문에 울어준 가족 이외의 존재였다. 우리는 직장에서 만났다. L언니는 나보다 늦게 입사한 경력자였는데, 쟁쟁한 회사에서 일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어쨌든 모든 면에서 나보다 경험이 많았다. 그런 언니에게선 산전수전 다 겪어본 '포스'가 느껴졌다. 우리는 비슷한 부분에서 예민했기 때문에 금세 친해졌다. 직장에 마음 줄 곳이 생기니 너무 든든하고 좋았지만,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이유는 팀 리더와의 트러블이었다. L언니는 매일매일 내 자리로 와서 나를 적극적으로 말렸다.
"보나야, 다시 한번 생각해봐. 지금 이직할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 요즘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 힘들어도 우리 같이 조금만 참아보자."
하지만 나는 언니들 앞에서는 어지간히 떼쟁이가 된다. 내가 끝까지 퇴사 입장을 고수하자 언니는 무척 슬퍼했고, 나의 앞날을 걱정했다. 물론 나의 결정은 언니가 충분히 걱정할 만큼 갑작스럽고 충동적이고 파격적이긴 했다. 걱정하는 언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고 그 회사에 남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최종 퇴사 결정을 앞두고 팀 단체 면담이 열렸다. 말이 면담이지, 거의 내 청문회 자리였다. 팀 리더와 나의 감정싸움으로 끝나게 될 것이 뻔한 자리였고,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상처가 되는 말이 폭격처럼 쏟아졌다. 나는 울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이미 모든 신뢰를 잃었으니, 우리 팀에 남고 싶으면 내가 널 다시 신뢰할 수 있는 뭔가를 보여주라고. 정말로 이상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L언니가 갑자기 내 입장을 대변하면서 울었다.
L언니가 울 줄은 몰랐다. 그 자리에서 비난받은 사람은 나였는데, 왜 L언니가 울기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그 면담이 끝나고 L언니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정말 본격적으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껏 어떤 언니도 내 앞에서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L언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뭉개진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나야. 가. 네가 너일 수 있는 곳으로 가. 여기서 이런 취급 받지 마."
나는 아주 오랜만에, 윗집 언니가 데이지의 매력을 가르쳐줬을 때만큼 감동 받았다. 그 순간의 L언니는 정말 언니다웠다. 비난받는 한 사람을 위해 나서서 목소리를 내기가 얼마나 두려운지 나는 안다. 그래서 언니가 더욱 멋있었다. 고마웠다. 나는 언니의 말대로 내가 나이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내가 L언니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 일을 계기로 L언니는 선배도 아니고, 직급도 아니고, 언니가 되었다. 아니, 선배보다, 직급보다, 언니가 되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언니라는 호칭은 많은 감정을 포함하고 있다. 존중과 사랑, 이해와 동경, 아무튼 그 외에 모든 긍정적인 것들. 그 감정들은 내가 언니들을 좋아하는 이유만큼 다양하다.
나이가 들수록 '언니'가 생기는 일이 드물어진다. 드물어서 더 귀하다. 이제는 어딜 가도 나보다 어린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예전보다 늘어나고, 나보다 '나이'가 언니인 사람을 만나도 대부분 선배님, 이거나 과장님, 차장님이다. 나도 어렸을 때처럼 굳이굳이 노력해가며 언니들을 주변에 늘리고픈 마음은 없다. 나이 들수록 새 언니가 생기는 일도 드물지만, 멋진 나의 구 언니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자 애정 표현은 이것이다.
저,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