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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Oct 24. 2020

빨리 집에 가고 싶다

010. 지인

나는 가끔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외톨이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느껴진다’는 건 나만의 생각이고 정말로 외톨이라는 쪽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인가? 그렇다. 나는 혼자가 아닌가? 그렇다. 혼자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사는 나는, 토요일 저녁에 약속 없이 집에 혼자 있는 나는, 오후 8시 30분에 할 일이 없어 침대 머리맡에서 발치까지 뒹구르르 구르는 나는 외톨이다.
아아, 심심해.
만약 이런 감정이 외로움이라면 나는 외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를 만나고 싶진 않다. 이런 감정이 외로움이 아니라면, 나는 외롭지 않다.

가끔은 카톡이 너무 많이 와서 귀찮다. 하나하나 열어보고 뭐라고 답장할지 생각하는 일이 쉽지 않다. 카톡의 대략 5퍼센트는 꼭 전해야만 하는 사항이고 나머지 95퍼센트는 하나마나한 말들이다. 그렇다고 내가 하나마나 한 말의 가치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세상의 대부분은 하나마나 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 ‘하나마나’처럼 보이는 것들이 오랜 시간 후에는 모든 걸 바꿔놓기도 하니까. 무용한 것들은 무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무용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하지만 무용한 대화는 가끔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종종 딴생각을 한다. 최대한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적절한 타이밍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구나, 정말? 하고 추임새를 넣는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친하다-친하지 않다 사이 어딘가쯤 애매하게 걸쳐진 인연일 때다. 예를 들어 3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어떤 모임의 누군가가 청첩장을 준다든가 하는. 3년이나 4년에 한 번쯤 만나다 보면 공통 화제가 거의 없어진다. 남자 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신혼집은 어디야? 추울 때 결혼하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모 언니 아이는 잘 큰대? 모 언니는 둘째 임신했더라. 나는 비혼이고, 당연히 자녀도 없기 때문에 어느 이야기에도 센스 있는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사실 이쯤 되면 우리가 친구라고 하기도 뭐하다. 친구라기보다는, '지인'이 우리 사이의 온도에 더 가깝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아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서 고양이들 껴안고 싶다.’

밥자리가 커피 자리로 넘어가고, 드디어 청첩장이 손에 들린다. 설마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진 않겠지? 이만 집에 가고 싶은데. 축의는 얼마를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 알 게 된 지가 몇 년인데, 10만 원? 아니야, 요즘 백수라 돈도 없는데... 기본 5만 원만 할까?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10만 원 하면 어쩌지?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이 모임도 얘가 결혼하면 흐지부지일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오가는 사이 이야기는 연예가 화제로 넘어간다. 나는 이제 더 할 말이 없어진다. 아 그랬어? 그 사람이 누군데? 응? A랑 B랑 사귀어? 근데 A는 누구고 B는 누군데?

정말로, 정말로 공통 관심사가 하나도 없다. 공통 관심사가 없어서 이야기는 더 공중에서 흩어진다. 어느 이야기도 단단하게 뭉치지 않는다. 마치 연기처럼 흩날린다. 흩날리는 연기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아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얼른 이 자리를 떠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싶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보아 말을 꺼낸다.

“난 슬슬 일어서야 할 거 같네, 집에 고양이들이 있어서..."

모두 자연스럽게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주섬주섬 챙긴다. 그럼 결혼식 날 봐.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집에 오는 길에 생각한다. 결혼식은 가지 말고 축의만 할까? 어차피 입고 갈 옷도 없고 난 결혼도 안 할 건데. 아, 정말 결혼식은 싫은데. 집에 오는 길이 허무하다. 어딘가 공허하게 텅 빈 것 같다. 알맹이 없는 말을 많이 한 날은 꼭 이렇다. 긴긴 여행에서 모든 걸 쏟아부어버리고 돌아온 것처럼, 비행기를 두 번 정도 갈아타고 경유해서 집에 온 것처럼 지친다.

이상 토요일 밤 8시 30분에 침대를 뒹굴거리는 외톨이의 ‘다다음 주에 있을 청첩장 모임’ 예상 시나리오였다. 외로움과 공허함, 둘 중에 뭐가 더 싫냐 하면 당연히 후자다. 알맹이 없는 말을 공중에 연기처럼 흩뿌리고 사느니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다다음 주 토요일 이 시간엔 청첩장을 받기 위해 예비 신부의 식사대접-커피 대접을 받고 있겠지. 아아, 차라리 외톨이고 싶다. 다음 주 토요일도, 다다음 주 토요일도 세상 제일가는 외톨이가 되어 고양이를 껴안고 뒹굴며 넷플릭스나 보고 싶다. 나는 외롭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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