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요즘 다들 읽는다는 책은 정말로 남들이 ‘다’ 읽고 나서 뒤늦게 읽는다. 이런 성격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이제야 읽고 있다. 늘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인 책들을 보면 '대한민국에 아직도 저 책을 안 산 사람이 있단 말이야...?' 하는 의문이 드는데 (예를 들면 좀비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든가) 역시 나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가능한 거였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왜 이 책이 반짝 뜨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사랑받는지 알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 이 글을 무척 쓰고 싶었다.
사랑은 존재할까?
나는 항상 궁금했다. 사랑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실체는 사실 다른 감정인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아닐까?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친구에게 “넌 사랑이란 게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다만,존재하지만 어려운 것이라고. 이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나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의견을 수정하기로 했다.
사랑은 있다. 있지만 드물다. 그리고 드물어서 더 귀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가치가 희소성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가치는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자체로 가치 있다.마치 모든 생명이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듯이.
사랑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발견'의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애란의 단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주인공은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준 선배를 두고 "내 머리에 붉은 동그라미를 그려 줬다"라고 말한다. 선배가 이름을 부르고 내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려 준 것은 나의 존재를 발견해 준 것이다. 관심은 발견에서 출발하고, 사랑은 관심에서 발전한다.
국민 시 김춘수의 <꽃>에서도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당신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고 하지 않나. 이름을 기억하고, 그걸 불러 주고, 존재를 발견해 주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사람들은 모두 발견되기를 원한다. 발견은 사랑의 씨앗이니까.사실 사라지고픈 충동조차 발견되고자 하는 욕망인 경우가 많다.나의 빈자리로써, 나의 부재로써 존재를 발견당하고 싶은 거다.자살 충동도 발견되고 싶은 욕구의 하나일 것이다. 나를 발견해줘. 지금의 나를 찾아줘. 제발, 하는 몸부림.
그래서 정말로 내가 사라졌을 때 나의 부재와 아무 상관없이 잘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더욱 절망하나 보다. 그 세상이 작을수록 절망은 깊다. 그 작은 세상에서마저도 내 부재가 발견되지 못했으니까.
발견이야말로 사랑의 시발점이자 관심의 새싹이 움트는 씨앗이지만 대부분은 사랑이라는 꽃을 피우기도 전에 좌절된다.우리는 상대의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눈도 우리의 '나'를 완전히 담을 수는 없다. 우리 가운데 어느 부분은 절단당하기 마련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
하지만 이런 끊임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때때로 멋대로 재단된 상대가 상상하는 내 모습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계속해서 발견과 관심을 본능적으로 원한다.
나는 사랑을 욕망하는 모든 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혹은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들키길 희망한다. 구석에 숨어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번엔 그 발소리가 날 발견하지 않을까 숨소리를 죽이고 은근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