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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Feb 25. 2021

네가 남편이 없어서 그래

날 사모님이라 부르지 마오

오랜만에 달게 낮잠을 자고 일어난 일요일 오후였다. 아직 2시여서, 일요일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모처럼 평온했다. 하지만 기상천외 라이프는 내가 평온한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또 사고를 일으켰다.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갔는데, 아뿔싸, 발이 축축한 것이다.


물이 왜 거기 있어...?


나는 입으로 들어가야 할 물은 까맣게 고 바닥에 흥건한 (거기 있어서는 안 될) 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엿 됐다는 예감이 아주 강렬하게 나를 휩쓸었고 서핑에 서툰 나는 그대로 그 예감에 빠져 엿 됐다! 엿 됐다! 를 외쳤다. 물은 싱크대 밑에서 주룩주룩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배수관 어딘가가 막힌  같았다. 싱크대 하부를 뜯어내고 엎드려서 호스를 꺼내보니, 파이프 끝까지 물이 찰랑찰랑  있었다. ... 파이프 안에서 마치 잔에 담긴 위스키처럼 찰랑대던 오수. 그러니까, 내가 물을  때마다, 아니,  세대가 물을  때마다 가장 아랫집인 우리 집으로 모두 역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됐다...


일단 모든 주민들 집에 일일이 찾아가 하루만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사 온  안면도 트지 않은 이웃집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어색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갑자기 벨을 누르는 외부인(?)을 경계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실 이건 건물 전체의 일이었지만, 피해를 보는  어차피 가장 아랫집인 나이기에 다들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서 계속 물을 닦고, 닦고, 또 닦았다. 하지만 물은 수건이나 걸레로 닦아낼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물 한 컵을 바닥에 쏟았다면 걸레로 닦아낼 수 있겠지만, 수영장의 물을 걸레로 닦아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주방에서 거실로 퍼져가는 오수 위로 나의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였다. 우리 집 벨이 울렸다. 옆집 아저씨였다.


“우리 집이 물바다가 됐어요!”


아저씨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나는 딱히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그저 슬프게 웃었다.


“예... 저희 집도요....”


일단 배수관 업체에 전화를 해서 월요일 아침으로 예약을 해놓고,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또 싱크대 밑에서 음식물 쓰레기와 기름때 섞인 물이 철썩철썩 파도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도 아침은 밝았고, 배수관 업체에서 수리 기사 두 명이 왔다. 집에 낯선 남자 둘을 들이는 게 조금 두려웠지만,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수리기사만 오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싱크대 앞에서 한참을 쩔쩔매는 것이었다. 싱크대 배수관이 막힌 경우, 정말 엄청나게 커다랗고 길고 무거운 철제 스프링을 배수관에 집어넣어 뚫는데, 아무리 넣어도 넣어도....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리 집 벨이 울렸다. 옆집 아저씨였다.


“우리 집 배수관으로 스프링이 튀어나오고 있어요!”


아... 우리 집에서 넣은 스프링이 옆집 배수관을 타고 간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드르륵! 드르륵! 소리와 함께 자기 싱크대에서 스프링이 꿀렁꿀렁 올라오는 걸 본 그는 뱀 괴수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이번엔 옆집에 가서 스프링을 넣어보았다. 이번에는 우리 집에 뱀 괴수가 나타났다. 이래서야 막힌 곳을 찾기조차도 힘든 상황이었다. 엿 됐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예상보다 일이 늦어지는 상황에, 수리 기사 둘은 짜증이 난 눈치였다. 수리 기사 한 명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사모님, 짜장면 먹고 싶지 않아요?”


순간 너무 당황해서,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밥을 사달라는 얘긴가? 내가 원래 점심을 사드려야 하나? 그런데 우리 집에서 짜장면을 먹는다고? 기사 한 분이 더 와서 아저씨 셋이? 차라리 아래층 식당에 가서 드시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당황스러웠다.


“아뇨, 안 먹고 싶은데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이거였다. 나는 정말로 짜장면이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기에 진실을 말한 것이었다. 잠시 아래층에 가서 식사하시라고 말할까 하는데, 수리 기사 A가 또 말을 이었다.


“그래? 난 왜 이렇게 짜장면이 먹고 싶지?”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벽에 걸린 나와 고양이 사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사진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나는 명백한 불쾌감을 느꼈고, 어물쩍 나온 그의 반말도 무척 신경 쓰였다. 이쯤 되니 밥이고 뭐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네. 그러세요...”


이렇게 대답하자 그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그러더니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다.


“아, X발. 똥 밟았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지금 저 사람이 욕한 거 맞지? X발이라고 한 거 맞지? 처음 든 생각은 기분 나쁘다, 가 아니라 무섭다,였다. 그들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 정확히 알고, 혼자서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면서 산다는 것도 알고, 연락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 앞에서 X발 똥 밟았네, 라며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뭔지 알았다. 혼자 사는 여자로서, 이른바 ‘남편’ 혹은 ‘남자 친구’ 없는, 즉 ‘보호자’가 없는 여자를 향한 업신 여김이자 깔보는 시선이었다.


결국 나는 총 네 명에게 그날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이상하게도 점심식사 전까지는 절대 뚫리지 않던 배수관이, 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10분도 안 되어서 뚫렸다.

이 일을 몇몇 친구와 엄마에게 말했더니 다들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남편이 있어야 돼! 집에 남자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널 무시하잖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로 결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고, 나는 계속 이런 위협과 수모를 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눈앞에 캄캄해지고 막막해졌다. ‘남자 없는 여자들’이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위협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참고로 이 이야기를 들은 선배 중 한 명이, 앞으로 그런 일이 생겨서 남자를 내세워야 하는 상황이 오면, 자기를 부르라고 해주셨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날 꼬박꼬박 사모님이라 부르며 육두문자를 내뱉던, 원형 탈모 아저씨. 그래서 그날 점심 드시니까 좋았어요? 어린 여자 협박해서 점심 값 뜯어내니 소화가 잘 되던가요? 하루가 잘 돌아가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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