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리 Jan 27. 2017

다른 길이 있다, 다른 길은 있다

간결함이 주는 깨끗한 여운

시작은 봉준호 감독이었다. 영화 ‘다른 길이 있다’ GV의 모더레이터로 봉준호 감독이 참석한다고 하길래,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이름을 찬찬히 살펴봐도 ‘봉 준 호’ 세 글자가 확실해서, 일단 예매했다.



나는 봉준호라는 감독을 정말 좋아한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영화의 모든 장면들을 전부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감독 봉준호가 추구하는 바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은 있다. 사람들이 때때로 좋아하는 영화들을 꺼내보는 것처럼,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봉준호 감독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를 꺼내보곤 한다 (그리곤 항상 같은 부분에서 막 탄성을 내지르며 좋아함). 그렇기에 한 번 믿어보자 하는 심산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봉준호가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한다는데 믿고 보자 싶었다. (솔직히 동명이인의 다른 감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끝까지 하긴 했다.)



그렇게 다소 불순한 의도로 보게 된 영화 ‘다른 길이 있다’는, 당초 목적이었던 봉 감독의 모더레이팅이 귀에 안 들릴 정도로 (물론 아주 잘 들음) 큰 울림과 떨림을 가져다주었다. 가끔 이렇게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영화를 볼 때면 그 대사를 떠올린다. ‘인생은 초콜렛 상자 같아서 무얼 뽑을지 알 수 없는 거야.’ 크으.











간결함이 안겨준 깨끗한 여운

다들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 같다. 어떤 내용을 전달하려는데, 자꾸 뭔가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게 되고 말이 늘어지고 땀이 삐질삐질 흐르던 기억. 그다지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건, 보통 그럴 때는 내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확실하지 않을 때란 거다. 말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하게 되지. ‘아 뭐래는 거여..’



즉, 나도 나의 의도를 정확히 모를 때, 발화는 장황해지고 핵심에서 벗어나며 메시지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조창호 감독은 자신만의 메시지가 확실한 연출자이자 각본가임이 분명하다. 최근에 2시간 20분짜리 1도 공감되지 않는 영화를 본 터라 그 피로감이 상당했었는데, 이 영화의 깔끔한 간결함으로 그 피로를 보상받았더랬다. 연출자가 ‘여운’이라는 공을 던지고, 그 공을 넘겨받은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영화는 첫 장면부터 과하거나 모자람 없이 두 주인공을 표현한다. 바로 '흰 새'와 '검은 새'의 채팅 장면인데, 누구든 그 창에 비춘 몇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사람들의 대화구나. 이런 감탄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이어지는데, 종국에는 결국 깨달음 하나가 가슴을 치고 지나간다. 아, 이런셀 수 없는 간결한 연출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 영화 자체가 된 거구나. 개별적인 간결함이 모여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장면들을 꿰어내고, 서로를 한 몸처럼 붙여내더니, 결국 이런 말끔한 하나의 영화로 재탄생될 수 있다니.









진흙을 담고 사는 남자
이런 연출의 힘을 가장 크게 느꼈던 장면 하나를 말해보자면, 남자 주인공 '수완'의 아픔에 대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정원'의 경우, 그녀가 왜 죽고 싶어 하는지 초반에 비교적 명확하게 나왔어서, 그럼 저 남자는 왜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을까 꽤 궁금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과 장면에서 그 모든 걸 이해해버렸다.


고등학생과 엄마, 그리고 과외선생의 역학관계를 수완의 세계에 잠시 들여놓음으로써, 대사 몇 마디로 정말 세련되게 그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상투적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그 이야기를, 흔한 회상 장면 하나 없이 화면 전환도 없이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 있다니. 남자 주인공이 그 얘길 하면서 오열하거나 목소리가 떨렸다면 하나도 안 슬펐을 것 같은데, 그냥 '오늘 아침밥은 김치찌개였어'라고 말하는 투여서 자신의 트라우마에 얼마나 오랫동안 질식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지 느껴졌다.




꼭 비커에 담겨있는 흙탕물 같은 사람. 침전시킨 진흙은 바닥에 깔려있고 바로 위에는 꽤 여과된 물로 나눠져 있는. 그렇다고 그게 흙탕물이 아닌 건 아닌. 그냥 진흙이 밑에 두껍게 깔려있을 뿐 언제든 섞여서 뿌예질 수 있는. 진흙을 저 밑바닥에 깔고 사는 남자의 과거와 현재를 큰 힘 들이지 않고 (=힘을 빼고) 전달할 수 있는 힘.




흔한 슬픈 음악도, 화면 효과도, 하다못해 우는 사람 하나 없는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수완이 너무 불쌍해서 울어버렸다.










고통을 티 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적이 있다. 부디 내일 아침에는 눈 뜨지 않기를. 이 침대가 검은 바다가 되어 그대로 밑으로 잠식된 채 저편으로 사라졌으면. 뭐 이런 흑역사들. 사실 그냥 날 떠난 연인에 대한 원망이긴 했지만, 그땐 나름 진지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다. 프로비련러.


그럼에도 다른 길이 있다의 주인공들처럼 구체적인 자살계획을 세우진 않았던 건, 아마 진짜가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가짜였던 내 속마음은,  '나 이렇게 밥도 못 먹고 맨날 술만 먹는다. 이래도 안 돌아올래. 나 좀 봐줘' 이거였을 터다. (요새는 안 이런다. 차여도 겉으로는 잘 산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다 알았고, 관심도 많이 받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평범하게 오늘의 할 일을 하면서 자살을 준비한다. 전혀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일상을 살아내는 그들을 모습을 보면서 '아, 저게 진짜구나' 깨닫게 됐다. 진짜 힘든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사실, 수완은 정원에 비해 평소와 다른 모습(전 여자 친구를 자주 찾아가는 등)을 보이고 다소 불안정한 감정상태를 내비치기도 하는데 그건 자살이라는 마라톤의 어느 구간을 달리는 중인지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스타트라인에도 못 서 본거고, 수완은 중간지까지는 달리고 있는 거고, 정원은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서 수 천 번도 넘게 자살을 시뮬레이션했을 완주자일 것이다. (별도의 설명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딱 90분짜리 영화를 보고 이런 점까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고통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건 그러니까, 꽤 수많은 다양한 시도-현실을 바꿔보려는 노력, 도움 요청, 이상행동 등이 모두 무산된 후의 자연스러운 행동 양상인 것이다. 그들이 원래부터 말하지 않고 티 내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희망이 절망이 되는 과정의 반복들이 원래 그들이 가진 고통보다 더 큰 생채기를 냈을 수 있다는 것. 마라톤 트랙을 온 힘 다해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을 자꾸 그 속으로 밀어 넣은 건 그들의 고통일까, 그 후의 절망들일까.











과연, 다른 길은 있는가. 있다면 가야 하는가.

영화는 그들을 그 지긋지긋한 마라톤 트랙에서 일단 벗어나게 해준다. 다른 트랙 위에 올려주지도, 다시 그 트랙에 서지 말라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주자들의 손을 잡아 트랙 바로 옆으로 비켜서게 할 뿐. 그래서 이 영화는 '다른 길로 가라' 가 아니고, 그저 지그시 알려만 주나 보다. '다른 길이 있다'고.



다른 영화들 같으면 다른 길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다 아는데 주인공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딱 그 정도의 유치한 이야기가 되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과 관객 모두에게 공을 넘긴다. '자, 다른 길은 이렇게 있어. 이제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야.'



자살과 죽음을 논하는 영화 중, 이렇게 세련된 방식으로 '무조건 살아야 한다'가 아닌 '혹시 잊은 것 같아서 그냥 알려주려고. 여기 다른 길도 있어.'라는 목소리를 내는 영화를 나는 처음 보았다. 반드시 죽음이라는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니라는 딱 그만큼의 담백함이, 무작정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폭력보다 오히려 그들에겐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신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최근 종영한 드라마 도깨비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내 마음에 남았던 한 대목이다. '다른 길이 있다'를 보고 나서 이 대사가 떠오른 건 왜일까.



우리 모두는 각자 감당하기 어려운 삶이 있고 그 고통의 정도는 분명히 사람마다 다르다. 나에게만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생각만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짧게 살다가는 한낱 바람 같은 존재들일뿐이다. 그렇기에 신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 생각하기보다는, 나만의 답을 찾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꼭, 정원과 수완도 그들 운명의 답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찾아내었으면.. 좋겠다.

날이 퍽, 푹푹해졌다.











(+) 눈이 펑펑 아름답게도 내리던 어느 저녁,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영화 속에서 내리던 눈발을 그대로 맞는 기분이어서 그 날은 그냥 나의 하루가 온통 영화와 같았다. 더할 나위 없었다.



(++) 봉준호 감독의 워딩 하나하나, 질문 하나하나가 내게는 너무나 완벽했다. 같은 영화를 보고 정확히 나와 같은 생각을 나눈 사람의 감상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순간임이 틀림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라랜드, 꿈꾸는 바보들을 위한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