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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어, 태국명상 여행 (7)

무엇으로 태어나도, 아니 소멸해도 괜찮다. 다 괜찮다.

5박 6일 하얀 수행복을 입고 머무른 시간. 원래 계획대로 2박 3일, 3박 4일 코스 총 7일 코스에 참여해야 하지만, 마지막 날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대신 일반 관광객으로 다시 오기로 했다. 사진을 찍으려면 핸드폰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공식 프로그램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모든 기록은 저희 시스템에 올려두었어요. 전체 일정 중에 1박 2일 마치지 못했으니, 다음에 꼭 다시 오세요."

스테프는 친절하지만, 엄격하게 말씀하신다. 내 남은 인생 언젠가 나는 다시 아유타야, 이 사찰에 다시 와야 한다. 내 인생 중 1박 2일은 여기에 빚을 졌다.


얼마를 내야 하나요, 물었는데 기부금 낼 수 있는 만큼 내고 가면 된다며 나무 박스 하나를 가리킨다. 돈을 안 내고 가든, 100밧트든, 100달러든 개의치 않아 보인다. 밥도 먹어주고, 수행복도 빌려주고, 불편하지만 잠자리도 내어주었는데 금액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시다. 무언의 강요도 없다. 얼마를 내야 한다 힌트 얻을만한 문구 하나 없다.


주위 다른 수행자들에게 적정 금액이 얼마냐고 물어봐도, 구체적인 금액을 말하지 않는다. 단 한 분, 남편이 2년 전 세상 떠나고 매달 여기에 오는데, 하루에 100밧 계산해서 낸다고 했다.

"그냥 자기 상황에 맞게 내면 돼요."

이구동성 그렇게 말하셨다. 정말 희한한 곳이군 싶다.


이런 프로그램이 운영되기 위해서는, 돈 있는 사람이 많이 내고, 돈 없는 사람이 적게 낼 수 있어야 한다. 돈 있는 사람도 와야 하고, 돈 없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올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부담 없이 머물 수 있는 이곳 시스템이 부러웠다.



다음날 새벽, 탁발식 시간에 맞춰 다시 돌아왔다. 탁발식을 다시 보니 기붓이 묘하다.


여기 오기 전, 낮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밥을 주지 않는다고 하길래, 잔뜩 겁먹어서 한국에서 에너지바와 라면들을 잔뜩 챙겨 왔다. 일주일 동안 먹어도,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걸 왜 가져왔을까. 20시간 정도 단식, 그게 뭐가 두려워서.


에너지바 큰 봉지 하나를 스님들의 탁발 접시에 올려놓는 순간 문득 이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항상 그랬다. 낯선 곳에 갔는데, 정말 먹을 것 없이 배고프면 어쩌지. 그곳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면 어쩌지. 영양적으로 효율적인 에너지바를 사가자. 그렇게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 계획이 없으면 불안했다. 모든 시나리오들을 그려두고, 일어나지도 않는 일들까지 걱정해 가며 살았다. 사실,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인정받는 데에 많은 도움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 편히 행복한 적은 없었구나.

나의 에너지바 한 봉지, 나의 마음을 탁발식에 놓고 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습관 같던 마음. 나의 일부처럼 자연스럽지만, 조금은 내려놓아야 할 것들.


탁발식 마치고 식당 주위를 어슬렁거리는데 아찰라 씨가 이리 오라며 손짓하셨다. 탁발식때 받은 음식들을 여승들께서 나누어 담고 정리하는데 같이 하자 하셨다. 여자 스님들 몇 분이 음식들을 정리하고 바구니에 담으면, 남자 스님 한 분이 흙색 손수건으로 일일이 바구니들에 손을 댄다. 여승들은 바구니를 두 손으로 받쳐 올리고, 과일 하나는 터트린다. 부처님의 축성을 담는 것인가.

아, 수행자들이 명상하고 있을 때 스님들은 이렇게 탁발식에 받은 음식들을 정리하고, 수행자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계셨구나.

식사 준비를 마치고 아찰라 씨는 나를 다시 부르셨다. 그리고 사찰 곳곳 내가 몰랐던 곳에 있던 부처님상을 보여주셨다. 나에게 직접 준비하신 연꽃을 건네주고, 헌화하며 부처님께 기도하라 했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용기를 주세요. 그리고 내가 여기서 만난 고마운 분들에게 마음의 평화가 있기를."



수행자 신분일 때는 무료였는데. 하지만 이제는 50밧트를 내고, 관광객으로써 옛 유적지를 찾았다. 그리고 며칠 전 자리 잡고 명상했던 곳에 다시 앉았다. 그때는 다시 태어나지 않길, 그 무엇으로도 다시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여기 앉으니,  다시 태어나도, 그리고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무엇으로 태어나도 괜찮고,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고통도 있겠지만, 좋은 순간도 있을 것이고. 깨달음 얻지 못하고 우매하게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겠지만, 또 그것을 만회할 기회들도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완전한 열반을 통해 해탈하는,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물론 괜찮은 일이다. 어느 것이든 다 괜찮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꽤 괜찮아졌다.

내 생애 가장 길고 긴 5박 6일 일정도 그렇게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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