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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선칠집중수행 4일차

오늘부터는 일정에 각산스님과의 수행인터뷰가 포함이다. 10여 명 정도 팀을 나눠서, 스님과 명상수행 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묵언수행 때문에 명상할 때뿐만 아니라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말하는 것을 자제했는데, 드디어 입 뗄 수 있는 기회다.


각산스님께서는 명상에 대한 소개 중에 '니미따'에 대해 여러 번 얘기하셨다. 깊은 삼매 속에서 빛을 보는 것인데, 보았다는 분들도 있고 나처럼 아닌 사람들도 있고.

사실 빛을 보았다는 분도, 잘 모르겠다. 환한 낮에 눈부심 아닐까, 아니면 깊은 삼매에 들면 빛이 보인다고 믿으니, 믿는 대로 보게 된 게 않았을까?

각자 몸의 반응도 달랐다. 허리나 어깨가 아픈 분, 그냥 1시간 앉아있는 것도 거뜬하신 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명상은 온전히,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니 어떤 의구심 가질 필요도 없다.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 거지.

왜 명상수행하면서 '묵언'하라 하셨는지 알겠다. 말을 꺼내는 순간, 사람들은 서로 비교하게 된다. 하물며 남들은 명상이 잘 되었나, 빛을 보았나, 무슨 경험을 했나 쓸데없는 비교를 하게 되니 말이다. 


명상에 집중하는 시간도 제각각. 보아하니 대부분 집중하다 망상도 들고 온갖 잡생각도 들고, 자신이 가여워 눈물이 나는 분들도 있고. 오전에는 울음을 참지 못해 꺽꺽 우는  분도 있었고, 눈물 참느니라 계속 코 훌쩍이는 분도 있었다. 과연 그분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았길래, 그토록 눈물 참지 못했을까.




호흡을 인식하며, 드론을 띄어 자신을 바라보는 오전 명상 중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예전에 사주를 봐주신 분이 해주신 이야기.


"사주팔자는 일종의 바코드와 같고,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이번 생애에서 얻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목적에 맞는 자신의 사주팔자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죠. 태어나기 전에 잊어버리긴 하지만 말입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운명 속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찾고 성취하고자 이 생에서 살게 되는 것이죠."


아니, 그렇다면 누구나 부자로 윤택한 삶을 살거나, 유명세나 권력을 가진 삶을 택할 거 아니냐. 뭔가 안 풀리고 답답한 이 모든 게 그럼 전생의 내 선택, 내 탓인 거냐. 뭐 그런 얘기를 나눈 적 있었다.

예전에 태국 명상여행 때도 이 이야기가 생각난 적이 있었다. 나는 무슨 목적을 이루고자 나의 운명을 선택해 태어난 것인가. 무슨 이유로 이 삶을 원한 것인가. 일복만 많고, 재물복도, 남자복도 없는 팔자라니. 일복 많은데, 사실 실속은 없고.

끝까지 명상하다 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맨 처음엔, 명상을 통해 처음엔 내 마음속 두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을 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내가 진정 원하는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지금은 행복을 넘어선 내 삶의 의미와 목적, 그것을 알고 싶어졌다.

수행 인터뷰 때 스님께 나의 이런 생각을 말씀드렸다.


"그것이 화두이지요. 간화선 명상을 할 때, 화두로 '나는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 질문에 계속 집중해 보세요."



"보편적인 명상의 방법은, 호흡을 통해 마음을 보고 삼매에 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 불교 경전에 나온 방법입니다.

북방불교, 대승불교의 간화선에서는 뜬금없어 보이는 말처럼 보이는 화두를 던집니다. 왜일까요? 바로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달라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결국 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드론을 띄어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주시하면, 결국 질문이 떠오르고, 답을 찾게 됩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은 누구고?

항상 맑게 깨어있는 이 놈은 뭐고?


초기 불교의 수행방법이 나의 인식상태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를 결합해서 이를테면 '숨 쉬는 것을 아는 이 놈은 뭐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녁 설법 시간에 해주신 말씀.

태국에서 위빠사나 명상할 때, 아쉬웠던 부분이 그것이었다. 이 호흡에 전념하여, 내 마음과 생각을 알아차리고, 또 그 감정과 생각들을 보내버리고. 그러고 나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음 단계의 간화선을 한 방법으로 찾은 모양이다. 오전 명상 중에 뜬금없는 질문이 떠오른 걸 보니, 어쩌면 이 단계가 자연스러운 것이구나 싶다.


사실, 이 질문에 집중하다 보면 자아분열이 올 것 같다. 마치 유체이탈해서 나 자신을 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생각에 대한 생각,' '인식에 대한 인식' 이것은 나의 메타인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메타인지적인 경험?

아니면 나의 자아(Ego), 이드(Id)를 조절하고 관장하는 초자아(Super Ego)에 관한 것일까.

어쩌면 부분적으로는 맞고, 어떤 부분은 그냥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인지하는 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를 인지하는 나. 어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말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정의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사실, 태어나는 데 굳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태어난 것 아닐까. 아파트 단지에서도 길고양이가 태어나듯, 햇빛 따스한 날이면 한겨울에도 성급하게 꽃봉오리가 맺히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삶에 의미부여를 하는 바로 자신.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하다 보면, 삶의 의미와 목적도 생기는 것 같다. 살고자 하는 의지도 생기고.

그러니 내가 찾아야 하는 건, 내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나, 그리고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는 나.


그렇게 넷째 날도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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