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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미싱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

6주 스커트만들기 과정, 스커트는 실패했지만...

슬기로운 백수생활이라는 제목을 붙이긴 했으나, 정말 슬기로운 백수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요즘엔 사실, 바쁘게 열심히 내 삶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돈 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돈 쓰는 일만 열심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야 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막연하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 이를테면 제빵, 제과, 옷 만들기, 떡케이크 이런 것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당장 창업하거나, 이런 분야로 취업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무엇인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오늘은, 6주 차에 걸친 스커트 만들기 수업이 끝난 날. 이미 시작하는 날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입을 수준으로 잘 만들 순 없겠구나. 기본적인 미싱도 안 되는데 입을 수 있는 수준의 스커트를 뚝딱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최종 작품 모양이 이상하다. 지퍼 달면서 미싱을 잘못했는지 뒷선은 삐뚤. 치마 밑단 둥글게 잘 박음질해야 하는데, 영 울퉁불퉁하다.

(그래도 용케 포기하지 않고 끝낸 것은 기특한 일이다.)



수업 속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혼자 나머지 공부 연습을 해야한다. 공장용 미싱기를 쓸 수 있는 데가 있으려나? 공방을 찾아봐야하나?

그런데 세상 참 좋아진 게, 굳이 내가 리서치를 하지 않아도 어느 날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의 신이 나를 이끌었다.


"공짜로 공장용 미싱기를 쓸 수 있다는 사실 알고 있으셨나요? 봉제 관련한 실무와 실습을 할 수 있는 서울패션허브. 동대문 DDP몰로 오세요."


패턴 그리고 재단할 수 있는 넓은 공간도 있고, 각자 쓸 수 있는 미싱기와 다리미까지 준비된 봉제실도 있다. 다시 실 끼우기부터 하고, 박음질 연습도 한다. 드드드드득, 얇은 실 두 줄과 천 두 조각이 만나 하나의 옷이 되고 가방이 되고.

아직도 이 미싱기 기계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참 신기하다. 이것이 산업혁명의 힘인가!


그런데 아니다 다를까, 자꾸 또 실이 빠진다. 바늘에 실을 다시 끼우고, 엉킨 밑실을 빼는데 한참 시간이 걸린다.


"미싱 기계는 아주 예민한 거예요. 조금만 실 꿰는 순서가 틀려도, 바로 엉켜버리고 실이 빠져버리곤 해요. 아이 다루듯 살살, 그렇게 살살 다뤄보세요."


옆 칸에서  파우치를 만들던 한 아주머니가 와서 실 꿰는 것을 도와주신다.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챙겨봐 주시는 분들이 있다. 내가 어려움에 허덕이지 않도록 도와주는 분들이 생긴다.


근사한 스커트를 만들고 싶었지만, 사실 그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공장용 미싱기계를 (조금은)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동대문 종합상가에 가서 맘에 드는 천과 레이스를 골라, 아주 심플한 테이블보 정도는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욕심내서, 책과 유튜브를 보고 에코백 만들기도 도전 중이다.


스커트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배우다 보면, 스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보다 더 심플한 에코백이나 테이블보 정도는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인생에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목표한 그것을 다 이루진 못해도, 그 비슷한 무엇에는 다다를 수 있다. 모르지, 그러다 또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도 있고.


그리고, 손으로 하는 무엇인가 하면서 온전히 몰두하는 그 시간 자체도 즐겁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無)의 상태에서, 무엇인가 창조해 낼 수 있는 유(有)의 상태로. 나는 조금씩 새롭게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자체의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경제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일일 지라 하더라도, 나의 삶에는 작지만 큰 변화이다.

나는 어질러진 내 방을 정리하고, 서랍을 정리하고, 얼룩덜룩해진 테이블을 감추는 예쁜 테이블보를 만들기로 했다. 무엇인가를 손으로 만들고 나서부터의 변화다.

내 일상생활을 돌아보게 되고, 직접 손으로 치우고 정리하고, 취향에 맞는 무엇인가를 고르고 만들고, 꾸미고 싶어졌다. 아름다운 것으로 내 공간을 장식하고 싶어졌다.


슬기로운 생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조금씩 차분하게, 내 생활과 나 자신을 정리하고 있다. 바쁘게 치이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일상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는, 나의 직업, 내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 일상의 내 삶이 제일 중요하다. 내가 먹고, 자고, 생활하는 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깨닫는데, 참 많은 사건들을 겪어야만 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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