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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17. 2022

간식 창고와 바퀴벌레

 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1)

딸깍…


오늘도 까맣게 불이 꺼진 건물 7층의 형광등을 켜며 아침을 시작한다. 간밤에 비가 온 탓에 밤새 7층에 스며든 습한 공기가 들어오자 흡 하고 숨을 한 번 멈추게 된다. 복도 끝 화장실 앞 내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언제나 니트 조끼를 입고 다니시는 우리 파트 차장님은 어제 야근을 하겠다시며 퇴근 시간을 한참 넘도록 모니터 앞에 앉아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반쯤은 남은 듯한 구론산바몬드와 다이제스티브가 책상에 지친 모습으로 널브러져있었다. 구론산바몬드에는 간밤에 초파리 한두 마리 정도는 빠져버렸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남은 다이제스티브는 과자라는 본분은 잊은 채 지난 밤의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져 버렸겠지만 아마도 차장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아침 간식으로 축축해진 과자를 맛있게 드실 것이다. 뚜껑이 열려진 채 하루밤을 꼬박 새운 구론산바몬드까지는 제발 건드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회사에서 고단한 하루를 이겨내려면 설탕이 듬뿍 함유된 달달한 주전부리는 단순한 간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아이템이 되었다. 나도 입사 후 회사라는 공간에 좀 익숙해지자마자 바로 서랍의 맨 아래 칸을 나만의 간식 창고로 만들어놓았으니 말이다. 물론 휴게실에 공용 간식함이라 불리는 무언가가 있긴 했으나 간식 창고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고 있지 못했다. 씹을 거리라곤 직원들이 휴가를 다녀온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는 유통기한을 목전에 둔 감귤 초콜릿이나 전병 따위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연중 내내 바뀌지 않는 현미녹차와 립톤 아이스티가 고정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믹스커피는 최근 맥심 모카골드에서 화이트골드로 바뀌었는데 사실 맛보다는 뇌를 깨우기 위해 먹는 용도에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그 둘의 차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장님은 예전에 먹던 모카골드가 나았다고 투덜거렸고 그보다 조금 젊은 대리는 요새 다들 화이트골드를 마신다며 간만에 찾아온 변화를 반기는 눈치였다.


제한된 간식 선택지 속에서 나의 개인 간식 창고는 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불가피하게 생성되었다. 잠이 올 때 한 알씩 꺼내먹는 멘토스, 커피와 함께 마실 로투스와 빅파이, 배가 많이 고플 때 먹을 요량으로 고구마말랭이를 비축해놓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옆자리 대리님 자리에서 바퀴벌레가 나온 이후로 나의 창고는 잠정 폐쇄되었다. 대한민국 금융회사 사무실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것이 말이 되냐고? 바퀴벌레의 등장은 광화문 고층 빌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징그럽기로는 손에 꼽혔지만 놀랍기로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하는 사건이었다. 바퀴벌레 이후로도 여러 다양한 종류의 상상도 못 한 일들이 등장해 나를 놀라게 만들었지만, 사람의 놀람 정도에도 한계 효용 법칙이 있는 것인지 나는 어지간한 일에는 점점 꿈쩍도 하지 않게 되었다. 벌레가 지나갔을 지 모를 과자봉지를 만지고 싶지 않아 할 수 없이 나는 남은 간식을 모두 갖다 버렸다. 혈당은 낮아졌지만 삶은 조금 우울해졌다. 우울함이 심해질라치면 휴게실의 립톤 두 봉지를 뜯어 혈관에 설탕을 수혈하곤 했다. 당분은 우울함의 가장 값싼 치료제였다.


컴퓨터를 켜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밤새 잠겨버린 머리를 깨우는 일은 나의 일상 루틴이 되어버렸다. 연식을 알 수 없는 나의 컴퓨터는 부팅을 하는데 꽤 오랜 시간일 필요했다. 내가 3년째 사용하고 있고 그마저도 기존 직원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물려받은 것이라 나이를 가늠하긴 어려웠다. 늙은 컴퓨터와 함께 일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보고 시간이 다 되어 급한 마음에 출력 버튼을 두세 번 누르려치면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는 가차 없이 멈춰버렸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급하게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려는 어르신의 큰 뜻을 종종 잊은 채 다급하게 저장 버튼 따위를 누르다 파일을 날려 먹기를 어언 3년. 이제는 제법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되어 컴퓨터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여유도 제법 생겼다.


웅.


컴퓨터의 묵직한 부팅 소리가 아무도 없는 7층의 눅눅한 공기 중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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