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2)
1화: 간식창고와 바퀴벌레
회사원이 된 지도 4년이 지났다. 어쩌다 보니 카드회사에서 4년 차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카드회사에선 무엇을 하냐고? 사람들에게 카드를 만들어 주고 소정의 가맹점 수수료를 받는 것이 회사의 주 수입원이다. 하지만 정부에서 카드 수수료라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기 때문에 카드 수수료만으로는 회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회사는 다양한 방법으로 고객에게 추가적인 돈을 받아내곤 했다. 연체 고객에게는 하루의 온정도 없이 냉정하게 이자를 끝전까지 받아냈고, 급전이 필요한 고객에게는 법이 허락하는 한 최고로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급전이 필요하지 않은 고객에게도 급전이 필요한 것처럼 만들고, 필요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부가서비스를 고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끼워 넣었다. 어떻게든 다양한 구멍에서 돈을 뽑아내고자 하는 회사의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업은 쏠쏠했고 우리 회사 대표의 연봉이 업계 최고라는 기사가 연일 신문을 장식했다.
아침마다 팀에서 담당하는 카드의 실적을 내려 일일 실적보고서를 보내는 것은 나의 주 업무 중 하나였다. 매일 전날까지 팔린 카드의 매수의 합계를 산출하고 엑셀로 예쁘게 정리해 아침 8시에 발송하는 업무였는데 바로 그 일 덕분에 나는 회사에서 손꼽을 정도로 일찍 아침을 시작해야 했다. ‘미라클 모닝’ 혹은 ‘갓생살기’ 등의 이름을 달고 일찍 일어나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소리높여 일찍 시작하는 하루가 얼마나 보람있고 상쾌한지를 역설했지만 지난 5년간의 경험을 보았을 때 이른 출근은 나의 바이오리듬, MBTI, 사상체질 중 단 하나에도 부합하지 않는 괴로운 일일 뿐이었다. 일일 실적 따위야 아침 8시에 보내든 오후 3시에 보내든 뭐가 그리 다를까 싶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자리 잡은 이 전통을 나의 나약한 마음으로는 차마 들이받지 못하고 3년째 도맡아 해오고 있다. 내가 입사하자마자 이 일을 나한테 넘긴 선배는 너도 내년에 후배가 들어오면 물려주면 된다고 말하고는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 같은 일일 실적 인수인계 파일을 넘겨주었다. 파일을 설명해주는 목소리에 은은한 기쁨이 섞여 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으리라. 선배의 인수인계 파일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고 상세해서 보기에 좋았으나 동시에 이렇게까지 만들어줬으니 앞으로 쓸데없는 질문으로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년이면 들어온다는 후배는 4년이 지나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누가 이 실적 보고서를 제대로 보기라도 하는 걸까 하는 의심이 들어 보고서 맨 아래쪽 구석에 ‘하기 싫다…’ 글씨를 3포인트 크기로 조그맣게 써넣어 보았다. 나로서는 엄청나게 혼날 것을 각오하고 한 일종의 반항이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글씨를 지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반항은 머쓱하고 개운치 못할 뿐이었다.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수능 성적표의 점수는 안 그래도 평소보다 낮았던 가채점 점수 보다도 낮은 점수였다. 1순위로 지망한 학교에서는 당연하게도 고배를 마셨다. 수능을 보고 난 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연중행사처럼 트럭을 불러 원하는 이들에 한해 3년간 쓴 참고서와 교과서를 버릴 수 있도록 하는 편의를 제공했다. 같은 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거의 책을 불태울 기세로 트럭에 던져버리기에 나도 어영부영 3년간의 연필 자국이 선명한 책들을 내던졌다. 버리는 순간에는 속이 시원한 것 같았다. 얼마 후 성적표를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때 책 버리지 말껄 이었다. 누가 봐도 재수를 해야 할 성적이었지만 다시 새하얀 참고서가 까맣게 되도록 공부를 할 자신은 없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3지망으로 지원한 학교에 덜컥 합격했고 재수를 포기하고 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고3 신분에서 갑자기 벗어났다는 익숙치 않은 해방감 반, 학교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불만 반쯤이 더해져 붕 뜬 채로 학교를 다녔다. 몇 학기가 지나도 학교는 여전히 낯설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들 하고 싶은 게 있어 보였다. 나도 어떻게든 그들과 비슷하게 보이고 싶었기에 꾸역꾸역 수업을 들었다. 나는 사실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라는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 것만 같아 최대한 조용히 학교를 다녔다. 뭘 하고 싶은지 이 공부가 나의 적성에 맞는지 고민을 할 새도 없이 마지막 학기가 되었고 그사이 학교는 나에게서 아니 정확히는 부모님과 은행에게서 몇천만 원의 등록금을 빼앗아 갔다. 마지막 학기가 끝나가던 때 나는 무엇을 어떻게 경영해야 할지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도 없는 상태로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다. 적당한 기업 몇 군데를 골라 원서를 넣었다. 최종 합격된 곳은 여기뿐이였기에 좋고 싫고를 따질 여유 따윈 없이 그대로 회사에 입사했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저 그런 학벌과 평범한 학점과 부족한 대외활동으로 채워진 이력서였지만 그 해 우리 회사 인사팀은 채용과정을 혁신 해보겠다는 의지가 생겼는지 블라인드 PT 면접이라는 걸 도입했다. 벌벌 떨면서 발표를 한 나를 관대한 면접관이 좋게 봐주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떨어진 걸 보면 내가 운이 매우 좋았거나 이 회사의 채용 기준이 특이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였던지 간에 나는 입사를 하게 되었다. 입사를 하고 나니 우리 학교 출신은 회사에 나뿐이었다. 동기들에 비해 전반적인 스펙 역시 한참 부족했다. 자연스레 동기들 사이에 S대 라인, K대 라인, Y대 라인이 형성되었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인 기타 라인에 아주 자연스레 포함되어 열심히 연수를 받았다. 이 회사가 어떠한 비전이 있는지, 내가 이 회사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나는 앞으로 어떠한 커리어를 쌓아야 할지 따위의 고민 없이 입사한 회사였다. 깊이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고민이 스쳤지만 깊이 생각해도 무언가가 없을지 모른다는 깜깜함이 무서워서 그만 두기로 했다. 대외적으로는 금융권에 뜻이 있어 지원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정말로 뜻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