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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도토리 Oct 23. 2022

갈색 벨트를 차고 갈색 구두를 신은 직원들

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4)

1: 간식 창고와 바퀴벌레
2: 새벽의 일일실적 보고서​​
3: 회사원이라는 페르소나

느려터진 컴퓨터를 달래가며 일보를 보내고 밀린 업무를 시작하려던 어느 날, 팀장님에게서 메신져가 왔다


윤 대리, 내 자리로


일반적으로 우리 팀의 업무는 팀장이 각 파트장에게 시킨 뒤 파트장들이 다시 파트원들에게 배분하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팀장님이 나를 직접 부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게는 컴퓨터가 뻑이 났다며 좀 봐달라거나 오늘 번개를 하고 싶으니 적당한 장소를 찾아 예약하라는 등의 업무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또 뭘 잘못 만져서 컴퓨터를 다운시켰을까 하는 생각하며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성실한 막내답게 노트와 펜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드카피를 선호하는 팀장의 자리는 항상 산더미같이 쌓인 출력물로 가득했다. 팀장의 자리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은 출력물만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팀장은 퇴사한 직원의 명패를 본인의 파티션 벽에 줄 세워 붙여두고 있었다. 떠나간 팀원들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며 다시는 팀원을 잃지 않으리라는 다짐이라도 하는 것인가 싶었다. 놀랍지 않게도 상품 3팀은 전사에서 퇴사율이 높은 축에 속했다. 월급은 동일한데 다른 팀보다 인정은 받지 못 하는데다 더럽게 많은 카드로 인해 일의 강도는 더 높았으니 어쩌면 팀을 떠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좋아하는 마조히스트 성향을 가졌거나, 용기가 부족하거나 둘 중 하나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인사팀에서는 팀장에게 높은 퇴사율을 들이밀며 직원 관리를 제대로 하라고 압박을 주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팀장님은 본인이 3팀의 팀장직을 맡은 이래로 퇴사한 직원 여섯을 떠올렸다. 남겨진 명패를 초점 없이 바라보며 진한 담배 냄새와 화이트골드 믹스커피 냄새가 섞인 한숨을 뱉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해서 팀장님이 7개째의 명패가 생기지 않기 위해 딱히 추가적인 노력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가끔 (장소 선정과 예약은 나의 몫인) 번개를 잡고 기름기 많은 비계가 잔뜩 붙은 삼겹살을 사주면서 열심히 하자 따위의 말을 하는 것으로 본인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바싹 튀겨진 삼겹살 기름 냄새가 머리카락에 잔뜩 배도록 고기를 구웠다. 고기를 구우면서 하루빨리 내 밑에도 후배가 들어와 고기 굽기와 일일 실적 보고서를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곤 했다. 잔뜩 쌓인 보고서를 한쪽으로 조심스레 밀어내고 가져온 노트를 펼쳤다. 바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을 보니 오늘은 컴퓨터를 고쳐 달라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딸깍. 삼색 볼펜을 누르며 어서 할 말을 하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우리 팀에서 관리하는 카드가 총 몇 종쯤 되지?


지난달 기준으로 132종입니다.


매일 매일 팀의 일보를 보내는 나에게는 관리 카드 수 정도야 언제 물어도 끝자리까지 정확하게 바로바로 읊을 수 있었다. 일일 실적 담당자만이 알 수 있는 쓸데없고 잡스러운 지식이었다. 지난달 마감 실적이 2만 1천 3백 2십 7매이며 이번 달 누적 실적은 8천 7십 1매라는 사실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팀장은 마감 실적을 묻는 대신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에 대표가 주간지 인터뷰 한 거 봤어?


대표 이야기가 나오다니… 일이 심상치 않을 확률이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대표는 우리 회사가 속한 모그룹 회장의 사촌뻘 되는 사람이었다. 집안 내에서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미미했던 탓인지 어렵게 얻은 카드사 대표 입지를 어떻게든 공고히 해 그룹 내에서 자리를 잡고 싶어 했다. 대표직을 맡자마자 이름도 생경한 팀들을 잔뜩 만들고, 잔뜩 만들어진 팀들은 그의 관심이 식자마자 조용히 공중분해 되어갔다. 40대라는 대표치고는 젊은 나이 때문인지 SNS도 활발히 하는 건 물론이고 다양한 매체와의 인터뷰도 경쟁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잦았다. 덕분에 우리는 대표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대표가 요즘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에 따라 회사가 들썩였다. 작년 패션지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벨트와 구두의 색을 꼭 맞추려 하고 있어요. 꽉 막힌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색이 맞지 않는 구두와 벨트는 제 눈에 너무 거슬린답니다. 갈색으로 통일하는 편이 마음에 안정을 주는걸요’ 라는 말을 남겼다. 다음날 회사 로비에서 본 회사의 남성 직원들은 모두가 갈색 벨트에 갈색 구두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처음 사 본 갈색 벨트가 멋쩍었는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갈색 벨트 소동은 몇 개월 후 대표가 금융사에서 가장 먼저 캐쥬얼 전환을 선언하면서야 없던 일이 되었다. 당장 지난주에도 대표는 경제지와 대대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표의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실 회의를 소집했다. 암호 해독가라도 된 듯이 한줄 한줄 활자화된 그의 말을 해석했다. 요즘 심경은 어떤지? 새로운 관심사라도 생겼는지? 어떤 인재상을 좋아하는지? 우리 회사의 미래 먹거리는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할지? 혹시나 우리가 하는 일이 그의 의중과 다르기라도 할까 봐 우리는 조바심을 내며 한 자 한 자 의미를 찾았다. 때로는 애매하게 적혀진 내용 때문에 회의가 산으로 가기도 했다. 그날그날 대표의 심경에 따라 인터뷰 내용은 다양하고 두서없었지만 늘 빠지지 않는 핵심적인 주제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다르다.’


기사 봤지? 또 그 이야기했잖아. 우리는 카드를 뭐 철저하게 기획해서 내놓는다 그거잖아.


그래. 이번에도 역시나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 회사는 생각 없이 카드를 만들지 않고 전략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 핵심적인 상품만 출시한다는 오묘하게 다른 회사들의 카드를 저격하는 코멘트였다. 물론 당연하게도 우리 회사만 특출나게 대단한 카드를 만들고 있지는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상품 3팀 아니겠는가? 전략과 라이프스타일에 전혀 맞춰지지 않은 카드가 수 백개는 되었으나 전사 카드 라인업에서 상품 3팀의 카드들을 대부분 지우고 나면 그럴싸하게 굵직한 카드들만 남았다. 대표가 좋아하는 그림이었다. 대표는 상품 3팀이 없는 나라카드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사를 읽은 어떤 사람이 대표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나 봐. 너네 홈페이지 보면 자질구레한 카드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거짓말 하냐고… 김정훈이라는 이름인데 계정에 들어가 봐도 프로필 정보도 없더라고. 경쟁사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거 지적하고 다니는 미친놈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작정하고 시비 건거같아.


아. 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어쩌면 내부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카드에 정말 관심이 많은 이거나 말이다. 입사하기 전까지는 모르던 사실이 있었다. 바로 생각보다 카드를 달달 꿰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꽤 많은 이들이 신용카드 할인 정보 공유 카페를 만들어 과연 어떻게 최소한의 연회비로 최대한의 수익을 뽑아낼 수 있을지를 연구하곤 했다. 때로는 홈페이지에서 찾아지지도 않는 숨겨진 카드를 찾아내거나 카드 담당자가 출시 시 미처 고려하지 못한 카드의 허점을 찾아내 혜택을 골수까지 빨아먹기도 했다. 이런 고급 정보를 서로서로 공유하며 카드에 대한 지식을 뽐내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 같았다. 가끔은 나보다도 우리 회사의 카드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나도 새로운 카드를 만들 때 먼저 그 카페에 들어가 정보를 검색하곤 했으니 뭐라 할 수만은 없었다. 김정훈이라는 이가 이런 카페의 멤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우리 회사에 불만을 가진 민원인이거나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시간을 들여 대표의 페이스북에 접속하고 댓글까지 달 정성이 있는 이가 있을까? 어쨌건 이럴 정성을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써주었다면 김정훈이라는 이의 삶이 더 윤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훈씨는 예사 사람이 아닌지 굳이 대표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그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카드를 들이밀며 공격하는 것을 선택했다. 정작 그 공격의 피해자는 나였다.


아무튼 그래서 대표가 홈페이지 들어가 보고 크게 화를 냈대…왜 이렇게 잡다구리한 상품이 많냐고. 윤 대리가 카드별로 현재 사용자 현황이랑 남은 유효기간 찾아보고, 자잘한 건들 다 빨리 정리해. 알겠지?


네…


평소 툭 치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넵! 이라는 대답이 이번에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3팀의 일은 늘 이런 식으로 갑작스레 생겨나곤 했다. 고민과 토론을 거쳐 주체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느새 사치가 되었다. 오늘은 김정훈 씨와 대표가 합작으로 정성스레 만든 일이 나에게 떨어졌다. 아무것도 적지 못한 수첩을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대표의 인터뷰는 새로울 것도 없었다. 만일 매체 인터뷰에서 대표가 우리 팀의 상품을 언급하며 우리는 이렇게 조그맣고 소소한 카드들도 많답니다라고 이야기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라웠을 것이다. 그 김정훈이라는 정체 모를 사람의 말마따나 우리 팀 상품이 자질구레하고 잡다하다는 사실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까도 언급한 OO안경점 카드가 우리 팀에서는 메이져급에 속할 정도이니 말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하나하나 빠질 것 없이 소박하기 그지없는 우리 팀의 카드라 할지라도 그렇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할 정도로 정통 없는 카드들은 아니었다. 132종 카드의 품의서에는 모두 대표의 결제 사인이 버젓이 박혀있었다. 하지만 대표는 우리의 카드들을 마치 잘난 오빠 언니 밑에 태어난 모자른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취급했다. 어디 소개하기는 부끄러워 손님이 와도 방에 들어가 있으라며 인사시키지 않는 그런 자식 말이다. 매체에서 바라보는 우리 회사는 모든 것이 계획되고 완벽해 보여야 했으며 우리의 자질구레 카드는 손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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