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카드 상품3팀 윤수진 (5)
1화: 간식 창고와 바퀴벌레
2화: 새벽의 일일실적 보고서
3화: 회사원이라는 페르소나
4화: 갈색 벨트를 차고 갈색 구두를 신은 직원들
어쨌든 회사원의 명분을 다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일을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전산 시스템을 켰다. 먼저 팀이 관리하는 132개의 상품별 식별코드를 전산에 넣고 사용자 현황을 산출했다. 허울 좋은 회사의 겉모습과 달리 회사의 내부 시스템은 매우 낙후되어있었다. 실적을 확인하려면 필요한 사람이 직접 실적을 뽑는 코드를 검정 화면에 입력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대형 팀들은 전담 데이터 인력이 한 명씩 배정되었지만, 우리 팀에 그러한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덕분에 뼛속부터 문과생인 내가 상품 3팀에서 4년을 보내고 나자 예상치 못하게 데이터를 능숙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도 써먹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능력치가 하나 더 생긴 거라고 위안하기로 했다. 입력한 132개 상품 중 유효기간이 석 달 미만 남은 상품은 53개였다. 100일의 유효기간도 채 남지 않은 상품에게 안락사는 과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그들에는 자연 소멸이라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남은 카드는 79개. 아직도 꽤 남아있었다. 79개 카드 중 사용자가 30명 미만인 카드를 추려보았다. 이 역시 코드로 한땀 한땀 작성해야함은 물론이었다. 사용자가 30명 미만인 카드는 총 49개였다. 슬픈 사실은 그 49개 카드의 회원을 총 합해보았자 채 천 명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카드들은 단 한 명의 열성 고객이 끝까지 충실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본인이 그 카드의 유일한 마지막 유저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겠지. 나는 그 마지막 사용자들에게 괜스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생각보다 현황 정리는 금방 끝났다. 팀장님과 상의하여 이용 고객이 30명 미만인 49개 카드들에 대해서는 즉시 단종 처리를 진행하고 대신 대체 카드로 교체발급을 해주는 것으로 설득해보기로 했다. 원칙대로라면 유효기간까지는 사용하게 해주어야 하지만 페이스북 비상사태가 일어난 이 마당에 대표에게 그 정도의 무른 대책을 가지고 갔다가는 팀의 존폐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대체 카드들은 대부분 상품 1, 2팀이 관리하는 잘나가는 카드들로 지정되었다. 지방의 OO마트 카드를 사용하는 이에게 다른 지방의 OO마트 카드를 대체 발급 시킬 수 없으니 1팀에서 만드는 마트 전 업종 할인 카드가 대체 카드로 지정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협의를 위해서 1팀에게 내용을 공유하는 메일을 보냈고 그런 소소한 일은 관심도 없다는 마음이 드러난 냉소적인 말투로 알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자연 소멸될 53개 카드와 즉시 단종될 49개 카드를 제외한 37개는 김정훈 씨가 쉽게 찾지 못하도록 홈페이지 구석에 숨겨두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5년 동안 이 카드 요양원에서 일하면서 나에게는 하등 쓸모없지만 동시에 꽤 편리한 모순된 능력이 생겼다. 회사가 출시한 모든 카드에는 카드를 구분할 수 있는 코드가 붙여져 있다. 전산에서 해당 상품을 쉽게 검색할 수 있기 위함인데 우리 회사에서는 알파벳과 영문의 조합으로 코드를 붙이곤 했다. 지난 5년간의 반복적인 업무의 결실로 나는 132개의 코드 모두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줄줄 혼자서 암송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카드 명을 읊으면 그에 맞는 코드를 망설임 없이 뱉어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번 단종되는 53개에 해당하는 코드들도 눈감고도 줄줄 댈 수 있는 카드들이었다. OO백화점카드 A00134, OO간호협회카드 D00584… 당장 옆 팀으로 이동하게 되는 날에는 그 즉시 쓸모가 없어질 소소한 장기이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머리에 코드명이 바로 떠오를 때면 마치 어릴 적 티비 프로에서 공룡 이름을 성공적으로 외워 냉장고를 선물 받은 어느 가장의 감격스러운 표정이 떠오르곤 했다. 방송국은 선물을 인질로 잡고 아버지들에게 하등 쓸데없는 도전과제를 제시하곤 했다. 공룡 이름 외우기, 접시돌리기, 식탁보 빼내기… 식탁보를 힘껏 당긴 순간,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자 뒤에서 아버지를 응원하던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운이 좋은 가장들은 미션에 성공해 냉장고 따위의 선물을 타가곤 했다. 그들이 아직도 오래전에 멸종된 공룡 이름을 외우는지, 명절에는 아직도 접시를 돌리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웃음을 자아내는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그들은 냉장고를 탈 기회라도 있었지만 내가 이 코드를 외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이따금 퇴근 시간이 8시 15분에서 8시 정도로 단축되는 일은 생겼을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코드를 안다는 것은 상품에 대한 애착을 형성시켰다. 비록 그 이름이 의미 없는 알파벳과 숫자의 나열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떤 상품에 대한 이슈가 생겼을 때 바로 머릿속에 B00001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일련의 일들이 반복되자 나는 점점 이 카드 요양원이 싫지 않아졌다. 오히려 우스운 우월감 같은 것이 생길 정도였다. 상품 1, 2 팀들이 운영하는 메인 카드들은 섬세한 감성이 떨어지는 공장에서 찍어낸 의미 없는 플라스틱에 불과한 것 같았다. 반면 우리 팀의 카드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있는 개개인을 위해 만들어진 수제품 같아 보였다. 이것이 자발적으로 생성된 감정인지 혹은 우울하게 죽어가는 카드들과 함께하는 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스톡홀롬 신드롬 같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가 담당하는 상품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사실은 회사를 다니는 데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외운 코드가 붙은 카드를 내 손으로 단종 처리하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그동안 카드 강제 단종이 없던 일은 아니었다. 제휴 계약을 맺은 업체가 중소도시의 인구 소멸을 이겨내지 못해 사라져 불가피하게 카드가 없어지거나, 일부 카드수수료가 지금과 같지 않았을 때 후한 인심으로 가지고 만들었던 관대한 상품들이 적자를 만들어내는 애물단지로 바꾸면서 어쩔 수 없이 서둘러 단종시켰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달랐다. 맨날 우리 본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대표의 독단적 지시여서인지, 내 손으로 만들었던 카드들이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카드 단종의 기준이 회원 수라는 가차 없는 줄 세우기 기준이라는 점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