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
Savile Row의 발전 과정을 보면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감(感)을 잃기보다는 늘 새롭게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알 수 있다.
20편이 넘는 필자의 연재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Savile Row는 클래식 남성복뿐만 아니라 현대의 럭셔리 브랜드에 귀감이 될만한 많은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영국 태생의 디자이너이기 때문도 하겠지만 Alexander McQueen과 Stella McCartney 등 시대의 천재 두 디자이너가 여러 기회 가운데 왜 젊은 시절 수습의 신분으로 Savile Row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겠는가?
Tom Ford 또한 Savile Row를 존중하는 마음과 한 수 배우겠다는 심정으로 Huntsman과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으며 Ralph Lauren은 Anderson & Sheppard에 매료되어 몇 차례 인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후 Savile Row의 영감을 살린 Ralph Lauren Purple Label을 론칭한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는 임대료에서 불구하고, Savile Row의 테일러들은 터전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해 왔다. 임대료 등 많은 비용이 상승했지만 만드는 제품의 퀄리티를 낮추는 등 헛튼 수를 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테일러들은 Savile Row 내에서 수트를 만들고, 영국과 이태리 등지에서 최고의 원단과 부자재를 공급받아 옷을 짓고 있다.
또한 Savile Row를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시(市) 당국은 비스포크의 전통을 보호하고 테일러들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 Savile Row를 특별정책 지역 Special Policy Area로 지정했다.
Savile Row는 다른 브랜드가 쉽게 모방할 수 없는 핵심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을 존중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키려는 운영 철학이 있다. 또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Savile Row는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Savile Row의 Case Study를 진행하며 가장 크게 받은 도전은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맞춘 ‘개인화된 서비스’이다.
산업화된 럭셔리 비즈니스에서 그 특성과 한계 때문에 ‘개인화된 서비스’를 적용하는 것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커다란 숙제이다. ‘개인화된 서비스’라는 것은 자칫 잘못 적용하면 ‘매뉴얼조차 없는 서비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뉴얼화 된 서비스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청담사거리나 도산공원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전문점 Flagship store 기준으로 설명해 보면 보통은 다음과 같다.
고객이 들어오면, 도어맨이 문을 열어주고, 세일즈 스태프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매장을 소개해 주고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서 상품을 제안한다. 이것만 잘해도 80%는 완성인데 사실 서비스 수준의 차이는 나머지 20%에 달려 있다.
더군다나 기본적인 매뉴얼도 세일즈 스태프의 역량과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때때로 요구되는 수준에서 어긋날 수도 있고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Savile Row의 서비스는 어떠한가?
Savile Row는 고객이 처음 방문하면 테일러 숍의 스타일과 디자인 철학을 설명하고 고객의 취향과 니즈를 우선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판매는 두 번째이다. 심지어는 첫 번째 수트를 맞춘 고객은 엄밀한 의미로 고객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그가 만족하고 재차 방문할 때 비로소 해당 테일러 숍의 고객이 되는 것이다.
우선 테일러 숍의 전면에 세일즈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객이 처음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제일 먼저 맞이하는 사람들이죠. 원단을 보여주고, 우리 테일러 숍의 스타일 등을 설명해 줍니다.
고객이 충분히 만족을 하고 Anderson & Sheppard에 이해를 한 경우 고객을 재단사에게 안내합니다. (수석 재단사, Anderson & Sheppard)
Savile Row 사람들은 단순히 판매 사원이라기보다는 패션 컨설턴트에 가깝다. 그럼 고객과의 관계는 그들의 전문성이 전부일까?
우리는 매우 작은 규모의 회사입니다. 이곳에 채용된 사람은 우선 친근하고, 상냥합니다. 업무를 마치고 우리는 가끔 고객과 함께 펍에 가기도 합니다. 고객과 연장된 관계인 셈이죠. (수석 재단사, Anderson & Sheppard)
우리 모두는 다른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Huntsman은 Bond Street에 있는 글로벌 브랜드와는 다른 곳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리테일 경력이 있습니다. Selfridge 백화점에서 근무했었죠.
매뉴얼화된 수준의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Savile Row에서 우리는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요.
고객 한 분 한 분이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는 고객들과 마치 오랜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려고 합니다. (수석 고객 매니저, Huntsman & Sons)
일과 후에 고객과 펍을 가고, 고객과 매뉴얼을 넘어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리테일에서 십수 년째 일하고 있지만 이 대목이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인터뷰에 응한 테일러들이 언급했듯이 이것은 매뉴얼로 지정할 수 없고, 순간순간의 분위기와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제일 근사한 행동은 ‘권한의 위임’이지만 제일 두려울 때는 ‘재량의 허용’이다. 또한 고객과 관계를 중요하게 강조하지만 그 한계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럴 때는 다소 비겁하게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게도 대하지 말라’는 불가근불가원 不可近不可遠의 원칙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위 워드 클라우드는 인터뷰에 참가한 5명의 테일러와 1명의 전직 글로벌 브랜드 임원의 인터뷰 내용을 질적 연구를 위한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인 NVivo를 통해 추출한 것이다.
인터뷰 응답자의 답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500개의 단어를 추출했으며 전처리 과정에서 customer, client 그리고 consumer 등의 동의어는 customers 하나의 단어로 통합했다.
단어가 언급되는 빈도수가 많아질수록 크기도 커지는데 결과 값은 보시다시피 ‘customers’가 가장 중앙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Savile Row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객이 최우선임을 알 수 있다.
Savile Row의 두 번째 교훈은 수습제도 Apprenticeship를 들 수 있다.
모든 재단사는 일정 기간 동안 트레이닝을 받아야 한다. coat, waistcoat 그리고 trousers 등 품목별로 과정이 나누어지는데 통상 9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참고로 영국에서 coat라고 하면 양복 상의를 뜻하며 waistcoat는 우리가 아는 vest를 말한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Savile Row에서 수습을 시작하는 많은 이들이 대학에서 패션/의류학을 전공한 경우가 많아서 전반적인 수습 기간은 coat 2년, waistcoat 1년 반, trousers 1년 반으로 조금 줄었다. 그래도 양복 한 벌 짓기까지 총 5년의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비스포크 테일러링은 몇 년 안에 배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의사가 되는 것보다 긴 시간이 필요해요.
수습제도는 Savile Row의 다음 세대를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스포크 테일러 숍은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Savile Row에 고용되는 세일즈 스태프들은 산업에 대한 지식을 겸비하고 고객에게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수년의 경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수석 고객 매니저, Huntsman & Sons)
이런 까닭에 Savile Row의 스태프, 재단사 그리고 테일러는 고객을 응대하기 충분한 지식과 기술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며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고객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준비했는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학부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90년대 말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 지속가능성은 별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경제적 지속가능성 Economic sustainability’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2018년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는 전공 탓인지,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환경적 지속가능성 Environmental sustainability’으로 간주되었다.
Savile Row 비스포크는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의류이다. 대부분의 비스포크 수트는 테일러 숍 후방이나 아래 위치한 공방에서 만들어진다. 벌써 제품의 이동에 따른 탄소배출이 제로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옷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여유분을 안쪽에 두기 마련인데 고객의 체형이 바뀔 때 약간의 수선을 통해서 계속 입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클래식 남성복은 100년 200년이 지나도 기본은 크게 바뀌지 않는데 만약 잘 관리된 옷이라면 약간의 수선을 통해서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물려주기도 한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Savile Row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을 지키면서 비스포크의 본산(本山)이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전 세계 수백수천 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럭셔리 브랜드가 일일이 따라 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운영 방법은 달라도 본질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Savile Row를 들여다보며 럭셔리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hoto42. https://concoursonsavilerow.com/the-ev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