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 여행 끝, 뜻밖의 행복

망설였던 타나롯 사원에서의 특별한 순간

by NYNO


역시, 할까 말까 고민이 될 땐 하는 게 좋다.

여행지에서는 귀찮음을 이겨내고 한 일들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자주 느낀다. 이번 발리에서의 타나롯 사원 방문도 그랬다.


2주 동안 발리에서 지내면서 유명 관광지는 거의 가지 않았다.

원래도 긴 이동시간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이번 여행은 반달살기처럼 느긋하게 보내고 싶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우붓에서 스미냑으로 넘어가는 택시에서 기사님의 추천을 받았다. 발리는 관광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 투어가 흔하고, 기사님들은 종종 투어를 권한다. 큰 관심이 없어 흘려듣다가, 딱 한 곳이 귀에 들어왔다.


"타나롯 사원은 유명한 일몰 명소야. 바다 위 바위섬 위에 세워진 해상 사원이라, 물이 빠질때만 걸어서 들어갈 수 있어."


평소 노을을 정말 좋아하기에 이 말은 너무 솔깃했다. 검색해 보니 마침 그날 물이 빠지는 시간이 딱 일몰 때였다. 하지만 걱정된 건 발리의 악명 높은 교통체증.

구글맵에 찾아보니까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앞이 엄청 막히고, 일몰시간엔 더 번잡하다고. 내가 묵은 스미냑 해변 근처에서 출발하면 트래픽 잼을 감안했을 때 택시로는 거의 두 시간이 걸리고, 오토바이로도 50분이 걸렸다.


고민 끝에 결국 오토바이로 가보기로 결심했다. (영업하신 기사님 죄송합니다ㅎ)

우붓에서 짧은 거리만 오토바이를 타봤는데 50분의 여행(?)이라니.. 약간 걱정도 됐지만 우붓-스미냑도 택시에서 한참 힘들었는데, 또 아깝게 택시에 갇혀 있을 순 없었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길은 너무 막히고 매연은 심하고, 하필 또 좋지 않은 바이크에 걸려서 엉덩이는 아프고…. 50분 내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달려갔다.

ㅠㅠ진짜 쉽지 않았던 라이딩


게다가 겨우 도착한 사원 입구에서 숙소에서 깜빡하고 현금을 안 챙겨 나온 걸 깨달았다. 우붓 원숭이 숲이 엄청 잘되어 있길래 여기도 당연히 카드 결제가 될 줄 알았는데, 현금만 받는다고 했다.

다행히 입구 옆 편의점에 ATM이 있어 돈을 뽑았지만, 어마어마한 수수료를 지불하면서 짜증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타나롯 사원의 풍경을 마주하자 모든 불평과 짜증이 씻겨 내려갔다.

해가 질까 봐 부랴부랴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탁 트인 바다와 해 질 녘 절벽 위의 사원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원이 정말 바위섬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의 신이 진짜 쉬러 오고 싶을 듯


바닷물이 빠진 길을 따라 사원 가까이 가니 사원 밑 동굴에서 작은 축복 의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걸 잘하지 않는데, 옆의 계단에 앉아 계시던 사제분들이 해보라고 권유하셔서 나도 모르게 줄 서있는 관광객 틈에 합류했다.


내 차례가 되어 바위에서 솟는 물로 손을 씻고 나면, 사제님이 머리에 성수를 뿌려주고 이마에 쌀알을 붙인 후 귀에 꽃도 꽂아주신다. "Bless you"라는 말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진심 어린 축복을 해주셨다. 별 거 아니었는데 잠깐동안 진심 어린 축복을 받고 정화된 느낌.

(*기부금을 내면 되는 구조라, 나는 아주 작은 돈만 기부하고 세레모니를 받았다. 앞의 발리 분들이 큰 돈을 드려서 조금 쫄면서(?) 냈는데 눈치 주시지 않았다ㅎㅎ..)



사실 타나롯 사원은 발리 6대 사원 중 하나로, 굉장히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진다.

발리의 ‘물의 힌두교’ 사원인 만큼 바다의 신을 모시고 있으며, 의복을 갖춰 입고 성지 순례를 하는 힌두교 신자들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곳에서 축복 의식을 받고 쌀알을 붙인 채로 돌아다니자니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사원 근처를 실컷 둘러보고 다시 위쪽 전망대로 급하게 올라왔다.

발리 석양은 해가 넘어간 뒤가 진짜 시작이기 때문.일몰 후에 하늘이 핑크에서 붉은빛으로, 깜깜해질 때까지 너무 아름답게 물든다. 그 장면을 1초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게 탁 트인 하늘을 보는데 갑자기 감동이 몰려오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진심으로 행복하고 싶다. 내가 진짜 행복을 온 마음으로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미뤄둔 감정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뭐가 잘 풀리게 해달라거나, 원하는 곳으로 이직하게 해달라거나, 그런 성취 중심의 바램은 한 적이 있지만 진심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빌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보통 달에 소원 빌 때도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빌지 않나? 그런데 그 순간만은 진짜로 나에게 마음을 주고 싶었다. 그 순간만큼은 가족도, 누군가를 위한 것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진심 어린 기도였다.



돌아가는 길, 마지막까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현지인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노을 배경으로 아내와 어린 아들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내가 먼저 찍어주겠다고 권유한 건 평생 처음이었다. 내가 받았던 축복 때문인지 선한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그 남자는 기뻐하며 핸드폰을 건넸고, 나는 아름다운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열심히 담았다. 여러 번 고맙다며 한국말로 인사하는 가족의 미소를 보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시원한 택시 안에서 꽤 행복했다. 우붓의 요가에서부터 이어져, 발리에서 마음의 평화를 온몸으로 누리고 있었다. 이마에 붙였던 쌀알은 진작 떼어냈지만, 귀에 꽃았던 꽃 한 송이는 버리지 못하고 간직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하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역시, 고민될 땐 그냥 해보는 거다.




▪타나롯 (Tanah Lot) - 규모가 작고 바위가 많은 섬에 자리한 전통적인 발리 힌두교 사원으로 바다 전망이 뛰어남 | Beraban, Kediri, Tabanan Regency, Bali 82121 인도네시아
▪입장료: 성인 IDR 75,000 (only cash)
▪관람시간: 오전 6시 - 저녁 7시
▪썰물 시간 확인 사이트
https://www.worldbeachguide.com/indonesia/tanah-lot-beach-tide-times.htm#google_vignette
▪돌아올 때는 그랩 택시를 사용했는데, 입구에서는 그랩 이용이 불가해서 주차장 쪽 말고 옆에 뚫려있는 다른 통로(?)로 쭉 나갔더니 조금 더 걸어가서 그랩을 탈 수 있었어요. 그랩을 잡으면 조금 떨어진 카페까지 걸어오라고 메세지로 알려주니, 구글맵 보고 큰 도로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돼서 힘들지 않습니다. 후기 찾아볼 때 택시 흥정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걱정했었기에 공유해 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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