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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웅식 Feb 21. 2024

나는 항상, '구끼'라고 말한다(9)

눈이 부시다. 빛줄기가 눈을 강타했다. 담에서 빛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눈부신 광채, 또 천사인가? 어머니가 기도하고 있는 것일까? 커다란 빛 덩어리가 담에 스며들면서 사라지고, 지웅이와 그는 손을 잡고 돌아왔다.

  음악이 오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춤을 추는 시간이다. 자원봉사자들은 그들이 각각 맡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두 개의 원을 그렸다. 안쪽에 원 하나, 바깥쪽에 다른 원 하나, 두 개의 원이 그려졌다. 나는 돋보기안경과 함께 안쪽 원을 만들었다. 돋보기안경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다. 빠른 음악에 맞추어, 원이 흘러가듯 천천히 움직였다. 동호는 갑자기 펄쩍 뛰면서 자원봉사자의 손을 뿌리치고 또 달아나려고 했다. 이번에는 어림없다. 한 명의 자원봉사자가 동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돋보기안경과 나는 서로 손을 맞잡고 빙빙 돌았다. 안쪽의 원이 시계 방향으로 빙빙 돌면, 바깥쪽의 원은 반시계 방향으로 빙빙 돌았다.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도 아니다. 빙빙 돌다, 처음의 자리로 돌아왔다. 결국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이다. 강강술래라도 하는 것 같다. 손에 손을 잡고 달이라도 뜨는 것을 맞이하는 걸까? 달을 맞이하려면 바깥으로 가야 하지 않는가?

 빛줄기의 끝자락이 또 나타났다. 눈부실 정도로 강렬하다. 분명 천사다. 나는 눈을 살짝 떠 천사를 애써 쳐다보려 했다. 빛 덩어리의 끝자락이 담 속으로 휙 사라졌다. 천사는 무슨 신호를 보내는 걸까?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다. 자원봉사자들은 그들이 각각 맡은 아이에게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갖다주었다. 나의 이집트 공주에게는 이미 스케치북이 있다. 이집트 공주를 맡은 자원봉사자는 그녀에게 물감, 붓을 갖다주었다. 이집트 공주는 운이 좋다. 그녀의 자원봉사자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부류이다. 그녀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림을 그릴 도구를 갖다주니 말이다. 나의 자원봉사자, 돋보기안경은 색연필 하나도 갖고 오지도 않는 채, 여러 아이를 보며 메모지에 계속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다. 나는 스케치북 한 장을 찢어 종이배를 만들 생각인데, 그는 나의 바람을 꺾어 놓았다. 그는 웅크리고 앉아 손바닥에 올려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메모지에는 파란 상자 아이들의 이름과 행동 등이 낱낱이 적혀져 있을 것이다.

  이집트 공주는 스케치북을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자원봉사자가 갖다 놓은 붓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손을 붓으로 사용했다. 오른손 손가락에 물감을 묻혔다. 첫 번째 손가락은 빨간색, 두 번째 손가락은 하얀색, 세 번째 손가락도 하얀색, 네 번째 손가락은 노란색, 다섯 번째 손가락은 검정으로 점점 물들어간다. 그녀의 자원봉사자는 벌떡 일어나, 물이 담긴 플라스틱 컵을 갖고 돌아와서, 나의 이집트 공주의 옆에 내려놓았다. 이집트 공주는 왼손에도 물감을 묻혔다. 그녀는 스케치북에 양손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녀의 손이 빨리 움직이다가 멈췄다. 그녀는 자원봉사자가 갖고 온, 물이 담긴 플라스틱 컵에 손을 걸쳤다. 손가락만 살짝 물에 담갔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물감이 빠져나가고 물은 검정으로 번져갔다. 

 돋보기안경이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집트 공주 뒤로 가서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고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또 적었다. 연필을 귀에 꽂은 다음, 그녀의 스케치북을 주시했다.

 “우와. 무슨 그림일까?” 

돋보기안경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그녀의 그림을 자신의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여기 보세요. 이 그림이 무슨 그림일까요?” 

 “이것 보세요. 왜 선미의 그림을 뺏나요? 오늘 처음 온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 맡은 아이에게 오시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우기에게 돌아가세요.”

 “장난 좀 친 것 같고. 화를 내고 그러세요?”

 “뭐라고요!”

 “돌아가면 되잖아요.” 

 그녀의 자원봉사자는 그에게서 스케치북을 뺏고 이집트 공주의 앞에 갖다 놓았다. 이집트 공주는 두 손을 번갈아 컵에 집어넣었다. 아까 보인, 이집트 공주가 그린 그림을 떠올려보았다. 두 개의 원이 있었고, 두 개의 원은 위와 아래로 맞닿아져 있었다. 밑에 있는 원에는 아홉 개의 알로 꽉 차 있었다. 눈사람이었을까? 위에 있는 원은 작았고, 밑에 있는 원은 컸고, 하얀색이었으므로. 아홉 가지의 알, 아홉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홉이라, 오늘 온 아이가 아홉 명이었다. 그 아홉이 여기에 있는 아이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홉 명의 아이들이 들어있는 눈사람인가? 눈사람에게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 두 개의 원은 눈사람이 아니라 사람일까? 그녀가 여자니까,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이집트 공주는 아홉 명의 아이들을 배 속에 집어넣고 싶은 것일까?  

 “으아. 나 죽어요.”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돋보기안경이다. 돋보기안경의 등에 큰 컴퍼스가 꽂혀 있다. 그가 발버둥 치자 컴퍼스도 흔들거렸다. 그는 손을 등에 갖다 대기 위해 손을 이리저리 뻗었다. 컴퍼스에 손이 닿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의 자원봉사자의 등에 큰 원을 그려놓고 싶은 모양이다. 뒤에서 재구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히죽거렸다. 등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겨냥해서 컴퍼스를 찔러넣은 재구의 솜씨가 남다르다. 자원봉사자들이 돋보기안경에게 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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