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2번출구에서 만나

너와 함께 있으면 그곳이 한강일 거야

by 아륜

안녕. 나 한강에 가고 싶어. 서울에 한강공원이 많지. 그중에서 여의도한강공원이 제일 좋아. 너도 그쪽을 좋아할 거 같은데. 우리 여의나루역 2번출구에서 만나자.


무슨 옷을 입을까. 나 그냥 편하게 입고 갈게. 너도 그래 줄래. 우리 아무 데서나 철퍼덕 앉아서 얘기 나누자. 돗자리 같은 거 필요 없어. 더러워져도 괜찮은 옷을 입고 와. 편한 신발, 가방은 가볍게, 마음은 더 가볍게.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건 너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는 거야. 나는 궁금해. 너의 흰 자가 얼마나 하얀지, 속눈썹은 긴지, 웃긴 말을 하면 눈물 같은 웃음을 흘리는지. 나는 그렇거든.


한강엔 치맥이지. 맥주를 꼭 사자. 종류는 상관없어. 요즘에 난 캔보다 병으로 자주 마셔. 더 차갑고 신선하고 무게감 있잖아. 입을 가져가 마실 때 캔은 날카롭지만 병은 부드러워서 좋아.


치킨 시켜도 돼. 후라이드가 좋아, 양념이 좋아? 황금올리브 후라이드? 아니면 뿌링클, 허니콤보, 볼케이노? 얼마든지 좋아. 난 대신 피자를 먹을게. 파인애플이랑 치즈가 어우러진 하와이안 피자면 좋겠어. 아니면 야채 피자나.


우리 컵라면을 먹을까? 어떤 걸 좋아하니. 왕뚜껑, 육개장, 도시락, 참깨라면, 불닭볶음면? 나는 유부우동을 먹을게. 괜찮지?


뭐든 좋아. 음식을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앉자. 흐르는 강을 바라보다가 가끔 시선을 주는 거야. 계속 쳐다보기에는 쑥스러우니까. 그게 좋겠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료수 같은 맥주를 마시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자.


서너 시간이 금방 갈 거야. 우리는 대화가 잘 통하니까. 다 먹으면 같이 분리수거를 하러 가자. 그리고 나 가글 하나만 사줄래? 화장실에 들러서 너가 사준 가글로 입을 헹굴 거야. 거울을 보고 틴트를 덧바를 거야. 혹시 눈곱이 끼지는 않았는지 점검한 뒤에 다시 너 앞에 설래. 그리고 작은 맥주를 사서 잠시 함께 걷는 거야. 조금 더 걸어가는 거야. 처음엔 입구 쪽에 앉을 거잖아. 흐른 시간만큼 조금 더 들어가 앉고 싶어. 강과 가까운 벤치에 앉을래. 이번에는 우리 사이에 맥주를 놓지 않을 거야. 맥주는 바깥쪽에 두고 너와의 사이에는 조금의 공기만 허락할 거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거야.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릴 거고 목소리 떨림도 느낄 수 있겠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지만 함부로 뻗지 않을 거야. 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거야. 너가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거야.


너도 나를 그냥 봐줄래. 너무 사랑스럽게 바라보지도 말고 귀여워해 주지도 말고 예뻐하지도 탐하지도 말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가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관찰해 봐.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들려. 너가 친 거니? 아닌가. 어디서 음악 소리가 들려. 공기라는 악보에 너의 목소리를 쥐고 음표를 그릴 거야. 우리 음악을 만들지 않을래.


분위기에 취할 것 같아. 화창한 날씨, 선선한 바람, 파란 하늘, 차갑게 떨리는 강물 소리. 내가 만약 갑자기 일어서면 그건 흔들리는 거야. 너무 놀라지 마. 흔들리는 나를 똑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나 몇 걸음 걸을 수 있어. 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줘.


더 이상 강물이 눈에 띄지 않을 때, 주위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맥주를 마시지 않을 때,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을 때, 그때 일어서자. 집에 갈 준비를 하자.


다시 여의나루역 2번출구로 걸어가자. 보라색을 타고 여의도역까지 2분만 같이 가자. 나는 9호선으로 갈아타서 고속터미널까지 내려갈까 해. 혹시라도 데려다준다고 하지 말고. 그러면 내가 힘들어질 거야.


그다음엔 뚝섬유원지로 갈까. 뚝섬 말고 유원지로 잘 와야 해. 아니 혹시 너가 뚝섬으로 가면 내가 뚝섬으로 갈게. 그러면 강 말고 숲으로 가지 뭐. 우리 숲속으로 들어갈까. 초록빛 숲내음을 맡을까. 한강보다 안전할 것 같은데. 그런데 너와 함께 있으면 그곳이 한강일 거야.


더위가, 이 여름이, 즐거워졌어. 너와 한강은 나에게 그렇게 시원한 취기야. 너무 걱정 마. 나는 취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너의 하루와 너의 지난날과 너의 미래와 너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거면 좋을 거 같아.


너가 얘기를 마치면 나 잠시 수다쟁이가 되어도 될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말이 많아질 것 같아. 혹시 좀 시끄러워도 시끄러워,라고 말하지는 말아 줘. 다른 말로 착각해 버릴지도 몰라.


여의나루 2번출구야, 그곳에서 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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