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저 은하계의 어느 행성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행성의 이름은 어나더랜드(AnotherLand)이다. 이 행성에 칼루미나 지역이 있는데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있었던 전설이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모수라는 강이 있는데 이를 경계로 칼루미나는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북쪽에는 눈의 숲이, 남쪽에는 축복의 땅이, 서쪽에는 모레하라가, 동쪽에는 고요의 숲이 있다. 그리고 남쪽 아래에는 바다가 있다. 눈의 숲과 고요의 숲은 이어져 있는데 이를 위대한 숲길이라고 부른다. 칼루미나 지역은 여러 개의 부족이 서로 힘을 기르며 부딪히면서 왕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북쪽은 산악지형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지만, 겨울이 길고 여름은 짧아 농사짓기에는 척박하여 사냥과 목재 판매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남쪽은 넓은 평야 지역으로 풍부한 물과 기름진 토양으로 농사짓기에 적당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늘 노동력이 부족하다. 동쪽은 끝없이 숲으로 이어져 있어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서쪽은 사막 지형으로 각 부족에서 추방당한 사람이 모여 가축을 기르며 살아간다. 남쪽 바다는 풍부한 해산물로 가득하지만, 여름이면 태풍이 생겨 큰 피해를 준다. 그리고 큰 섬이 하나 있는데 화산섬으로 지진이 자주 발생하고 늘 물자가 부족하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간다.
남쪽 축복의 땅에 있는 시에나 부족의 부족장 로와탄은 자신이 부족장이 되면 주변국을 정복하여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심복을 만들고 부족장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시에나 부족의 가장 큰 문제는 농사를 짓을 노동력의 부족이다. 그래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주변 부족으로부터 노예를 사들였는데 그 숫자는 매우 적었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변국을 정복하여 그 부족을 노예로 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는 일이기에 실패할 경우 국력이 쇠락할 수 있어 주변 부족에게 도리어 침략을 당할 수 있다. 로와탄은 군사를 늘리고 군비를 갖추며 꾸준히 전쟁 준비를 했다.
3년이 지나자 로와탄은 예언자를 찾아가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았다.
"예언자 노스트라여! 내가 하르센 부족을 정복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가능하겠는가?"
"부족장이여! 그대의 뜻대로 하소서. 그대에게 영광이 있을지니.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래. 하하하. 예언자마저 나를 축복하니 곧 원로들을 설득하여 하르센 부족을 치기로 결정하겠네. 언제가 좋겠는가?"
"열흘 후에 출전하면 됩니다. 오호. 이런 일이...."
"왜? 무슨 불길한 요소가 있는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축 드릴 일이 있습니다. 이번 출정으로 부족장께서는 결혼 상대를 만날 것입니다. 아주 현명하고 강인한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내 결혼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번 출정에서 돌아오는 대로 스브스 원로의 딸 헬레나와 결혼할 예정이다. 그녀가 아니라면 결혼 상대는 누구인가?"
"제가 아는 것은 사건일 뿐이지 대상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현명하고 강인한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열흘 후, 로와탄은 직접 군사 1,000여 명을 이끌고 서쪽에 있는 하르센으로 진격했다. 하르센은 작은 부족으로 인구가 5,000여 명이며 방어 상태는 무방비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허술하였다. 침략한 지 닷새 만에 하르센 부족은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심복 제롬을 하르센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하르센 부족장을 시에나로 끌고 갔다. 시에나에 돌아오는데 날이 저물자 가까운 마을에 들러 야영하기로 하였다. 그 마을 촌장은 로와탄 부대를 열렬히 환대하고 극진하게 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촌장은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였는데 로와탄은 촌장의 막내딸 베아트리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는 촌장에게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두 번째 부인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첫 번째 부인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난감해진 로와탄은 일단 베아트리체를 데리고 시에나로 돌아갔다. 승리의 귀환과 더불어 로와탄의 결혼식이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헬레나와 베아트리체 중 누가 첫 번째 부인이 되는가였다. 시에나의 많은 부족민은 권력자의 딸인 헬레나보다 평민의 딸인 베아트리체가 첫 번째 부인이 되길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로와탄은 예언자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세 가지 겨루기를 통해 우승한 자를 첫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면 원로들과 부족민의 원성을 차단하고 우승자는 떳떳하게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요. 그럼 어떤 겨루기를 통해 우승자를 결정하면 좋겠는가?”
다음 날, 시에나에는 헬레나와 베아트리체의 겨루기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첫 시합은 활쏘기였다. 10발을 쏘아 점수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방법이다. 결과는 싱겁게 끝났다. 헬레나는 10점을 넘기기 어려웠지만, 베아트리체는 100점을 쏘았다.
다음 시합은 수수께끼 풀이였다.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다.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다.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인다.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다.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이 있다.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다.
셋째를 보려고 하면,
다른 두 형 중의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들은 함께 커다란 왕국을 다스린단다.
또 왕국 자체이기도 하지! 그 점에서 그들은 똑같다.
헬레나는 수수께끼의 답을 모르겠다고 포기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수수께끼의 답을 정확히 대답했다. 이로써 두 번째 겨루기도 베아트리체가 승리했다.
세 번째 시합은 정복한 하르센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먼저 헬레나가 말했다.
“지금 하르센 부족민은 패배에 대한 분노로 무조건 우리 부족에게 반역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감시와 억압으로 통치하고 신분은 노예로 격하시켜야 합니다.”
베아트리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하르센 부족민은 패배에 대한 분노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억압하기보다는 달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노예 신분이 아닌 우리 시에나 부족으로 여기고 똑같이 권리와 의무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르센 지역은 이번에 끌려온 부족장으로 다시 통치하게 하는 자치권을 부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르센 부족은 반역의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시합에서도 만장일치로 베아트리체가 승리했다. 그녀의 완승이었다.
로와탄은 베아트리체를 첫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고, 헬레나는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는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 후 첫날밤에 그는 베아트리체에게 수수께끼의 답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첫째는 미래입니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과거입니다. 벌써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지금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입니다. 현재가 없다면 과거와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가 과거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다스리는 왕국은 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시간입니다.”
예언자가 말한 현명하고 강인한 결혼 상대는 바로 베아트리체였다. 1년 후 베아트리체는 아들 그라이언을 낳고, 다음 해에 헬레나는 첫 번째 아들 듀란을 낳았고, 그다음 해에 헬레나는 두 번째 아들 우바를 낳았다. 로와탄은 주변 부족을 계속 정복하며 거대한 국가를 만들어 마침내 시에나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부인 베아트리체의 조언에 따라 정복한 부족민에게도 시에나 국민과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면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주변 부족들은 시에나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가 연합하여 국가를 건설하여 콘도르, 리마트, 파보사, 하르바, 요곤 등이 나타났고 10년간 칼루미나 지역은 평화롭게 지냈다.
시에나 왕국은 계층구조가 왕족, 보좌, 시민 그리고 노예로 구성된다. 왕은 보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만장일치로 선출한다. 왕의 가족은 왕족이 되는데 왕족도 보좌가 되어야 왕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 보좌는 시민 중에서 시험을 거쳐 선발되며 왕국의 다양한 보직을 담당하면서 자신만의 부대를 조직하는데 전쟁 시에는 그 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다. 보좌는 15세가 되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왕이 되지 못한 보좌는 35세가 넘으면 원로가 되어 왕의 고문 역할을 한다. 시민은 왕궁에 소속되어 근무하거나 각 보좌의 부대에 소속되어 있으며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시작되면 소속된 부대의 병사가 되어 전투에 참여한다. 남자는 18세부터 35세까지, 여자는 18세부터 25세까지 병사가 된다. 그 외는 전투를 지원하는 일에 동원된다. 노예는 보좌와 시민에 소속되어 집안 일과 농사일에 종사한다.
헬레나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열등감으로 괴로워했고 특히 첫 번째 부인이 되지 못한 것이 자신에게 엄청난 수모라고 여겼다. 그래서 베아트리체를 암살하려 했으나, 그녀의 현명한 대처로 헬레나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크게 상심한 헬레나는 두 아들을 이용해 베아트리체에 복수하고자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로와탄의 후계자로 두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 역시 아들 그라이언을 로와탄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학업과 무예는 물론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과 음악까지 두루 교육하였다. 로와탄의 세 아들은 차례대로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보좌가 되었다. 그라이언은 무기를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활 쏘는 부대를 조직했다. 듀란은 치안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으며 도끼 다루는 부대를 조직했다. 우바는 역량을 인정받지 못해 아직 부대를 조직하지 못하고 듀란의 부대에 소속되어 있다.
“어머니, 이제 계획한 거사를 실행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 이번 사냥 대회에서 반드시 일을 성사시켜야만 그라이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어! 그래야 베아트리체에게 당한 수모를 되돌려 줄 수 있다.”
“어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우바와 함께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아들아, 너희만 믿는다. 만일 일이 실패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책임지겠다.”
헬레나는 말을 마치고 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며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번 사냥 대회에 폐하도 참여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젠 나이도 있으시니 빠지시는 것이 어떤가요?”
“무슨 소리. 내 아들들이 모두 참여하는 오랜만의 사냥 대회라 내가 빠질 수 없지. 걱정하지 마시오.”
로와탄은 장비를 챙기며 베아트리체에게 말했다. 그녀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사냥 대회는 1년에 한 번 치러지는 것으로 우승을 하면 왕이 되는 자격 중 하나를 획득하는 것이어서 매우 중요한 행사다. 우승은 사냥물의 개수와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사냥은 반드시 보좌만 할 수 있고 병사들은 사냥감 몰이만 해야 한다. 사냥 시간은 6시간인데 3시간씩 전후반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서로가 자신이 잡은 사냥감이라고 시비가 붙기도 했고, 보좌가 사냥감에게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가끔은 사냥 도중에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경우도 생긴다. 로와탄은 오랜만에 사냥 대회에 출전한 기념으로 곰을 사냥하고자 했다. 우렁찬 북소리와 고동 소리가 울리면서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보좌들은 일제히 달려 나갔다. 그라이언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왼쪽을 달려갔고, 듀란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시에나의 동쪽 고요의 숲에서 100여 명의 보좌들이 승리를 위해 열심히 사냥을 시작했다.
사냥이 시작된 지 3시간이 흘렀다. 그라이언은 부대원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보좌님이 이번 사냥에서도 우승이 유력하네요. 노루 3마리와 여우 1마리 잡았으니.....”
“이번에 새로 만든 화살을 시험하려고 참여했는데 성과가 좋군. 후반 사냥 때는 개량한 화살을 사용하게. 아이언 부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폐하께서도 사냥 대회에 직접 참여하신다고 들었는데 어찌하고 계실지? 그런데 에린 병사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그때였다. 북소리와 함께 함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왕을 호위하는 근위대가 그라이언 부대를 에워쌌다.
“이 무슨 행위냐?”
전투태세를 갖춘 그라이언 부대는 포위한 근위대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그라이언 보좌는 역모 사건으로 체포 명령이 떨어졌으니 순순히 따라오시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역모는 또 무슨 말이냐?”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형님. 여기서 저항하면 형님은 진짜 역모에 해당합니다. 역모와 무관하다는 해명은 폐하 앞에서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동생 우바가 나서며 말했다. 그라이언은 사태를 파악하고 부대원에게 무장을 해제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포박당한 채 우바를 따라 궁으로 압송되었다.
사냥이 시작되고 1시간 후 로와탄은 곰 사냥 중에 날아온 화살에 다리를 맞았다. 그 화살은 그라이언 부대가 사용하는 화살이었고, 화살은 쏜 병사는 그라이언 부대원 에린이었다. 이는 왕의 시해를 노린 역모 사건으로 간주되고 그라이언 체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끌려간 그라이언은 왕에게 화살을 쏜 부대원과의 관련성을 묻는 고문을 당하였다. 에린 병사는 그라이언의 명령에 따라 왕의 사냥에 몰래 잠입하여 화살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그라이언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모든 수사와 조사의 지휘는 듀란이 담당했다.
“그라이언 보좌님. 이제 꼼짝없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당하게 생겼습니다. 에린뿐만 아니라 우리 부대의 몇 명도 듀란 보좌의 회유에 넘어가 역모에 관한 증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거 정말 백척간두의 상황입니다.”
아이언 부관을 비롯한 서너 명이 옥에 갇힌 그라이언을 찾아왔다. 고문에 지친 그라이언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반짝였다. 그는 힘들게 손을 들어 아이언 부관을 가리켰다.
“아이언 부관!”
“네. 그라이언 보좌님!”
“여기를 탈출해야겠다. 베아트리체 왕비를 모셔오너라. 그리고 베라에게 배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너희들은 내가 탈옥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하거라. 거사는 내일 베아트리체 왕비께서 감옥을 떠난 직후에 시작한다. 어서 움직여라.”
“어머님. 저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탈출뿐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이 모든 일에 원인은 나 때문이다. 네 아버지와 결혼을 할 때 첫 번째 부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나는 예상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랑하는 하르센 부족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부족은 영원히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나와 너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눈물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라이언 역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고 창밖에 보이는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는 이곳을 탈출하여 시에나를 떠나려 합니다. 다만 이곳에 남겨지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오~ 사랑스런 나의 아들아! 내 걱정은 말고 부디 무사히 떠나거라. 그리고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
베아트리체는 눈물을 거두고 일어나 자세를 고쳤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추고 그라이언을 몇 초간 돌아보았다.
베아트리체가 나간 것을 확인한 아이언은 휘파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라이언의 부대원 두 명이 옥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둔탁한 소리를 듣고 옥을 관리하는 병사 몇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화살이 쏟아졌고 병사들은 쓰러졌다. 옥문을 부수고 들어간 병사들이 그라이언이 갇힌 창살에 여러 개의 줄을 묶고 나서 줄끝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 밖에는 이미 5마리의 말이 준비되었고 줄끝을 말에 묶었다. 말이 달리자 그라이언을 가둔 창살이 우지끈 뜯어졌다. 진압하러 온 병사들도 하늘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그라이언은 옥문이 사라지자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을 나왔다. 준비된 다른 말에 올라타고 예정된 목적지로 달려갔다. 그 뒤를 그라이언의 부대원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맨 마지막에 뒤따르던 그라이언의 병사에게 작은 손도끼가 날아와 등 뒤에 박힌다. 도망치는 그라이언 일행을 듀란의 부대가 쫓기 시작했다. 듀란의 부대는 거리가 좁혀지자 손도끼를 던져 뒤쳐진 그라이언의 부대원을 맞힌다. 아이언 부관은 몸을 돌려 화살을 쏘아 추격하는 가장 앞쪽의 말을 맞혔다. 그라이언은 신중히 겨눠 듀란의 부관을 쏘았다. 듀란의 부관은 한쪽 눈을 부여잡고 말에서 떨어졌다. 추격대가 주춤하자 그라이언 일행은 치고 나갔다. 목적지는 모수의 리모투 나루였다. 그곳에 베라가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그라이언 일행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는 추격대가 따라왔다. 베라는 부대원에게 화살을 쏘라고 명령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그라이언 일행을 넘어 추격대를 맞혔다. 화살을 맞은 추격대는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그라이언 일행이 배에 올라타자 곧 배를 띄웠다. 추격대가 나루에 도착했을 때, 배는 서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바는 추격을 포기하고 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라이언 일행이 시에나를 탈출했다는 보고를 들은 베아트리체는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였다.
그라이언 일행을 태운 배는 모수를 따라 서쪽을 흘러가다가 모레하라 지역에 다다랐다. 탈출하느라 피곤한 일행은 널브러져 잠을 자고 있었다. 오직 베라만이 주위를 경계하며 배를 강기슭에 가까이 대려고 애를 썼다. 잠에서 깨어난 몇 명이 일어나 배에서 내려 베라를 도와 배를 강기슭에 대었다. 배가 멈추자 베라는 아이언을 깨웠다. 잠에서 깬 부대원이 자고 있는 다른 부대원을 흔들어 깨웠다. 아이언은 그라이언을 찾아 흔들었다. 그라이언은 눈은 떴지만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고문의 후유증과 필사적인 탈출로 인해 온몸이 탈진 상태였다. 아이언은 베라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고, 주위에 있는 두 명의 부대원과 함께 그라이언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등에 업었다. 각자 자신의 장비를 챙긴 그라이언 일행은 배를 불태우고 모레하라 지역으로 들어갔다.
시에나의 궁에서는 그라이언을 놓쳤다는 보고를 받은 듀란은 우바에게 새로운 추격대를 조직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비 베아트리체와 그라이언 부대원의 가족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자결하였고 그라이언 부대원의 가족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듀란은 분을 삭이지 못해 손도끼로 그라이언의 방을 닥치는 대로 부수었다.
로와탄은 베아트리체가 자결했다는 말을 듣고 실신하여 사흘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독이 묻은 화살을 맞은 다리 부위가 썩어가기 시작하자 로와탄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원로들을 불렀다.
“그대들과 함께 시에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소. 이제 나는 떠날 때가 된 것 같소. 그라이언은 역모를 벌이고 실패하자 도주를 하였소. 반드시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니 아마도 이 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오. 그대들은 새로 뽑힌 왕을 도와 그라이언을 막고 시에나가 더 번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시오.”
“폐하. 힘을 내시지요. 시에나를 위해 반드시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러하여야 합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번 역모의 배후라고 알려진 그라이언 보좌는 절대로 그러한 일을 할 위인이 아닙니다. 음모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이를 조사하셔야 합니다.”
제롬 원로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었다. 그는 이번 일에 의심을 품고 있으며 조사가 조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롬. 나의 오랜 친구이자 그라이언의 스승인 그대가 이런 말을 한 까닭이 반드시 있으리라. 어서 말해보게.”
“폐하. 그라이언은 여러 보좌 중에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나서 왕의 계승자로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왜 폐하를 시해하려는 마음을 품겠습니까? 증거라고는 폐하께 화살을 쏜 그라이언 부대원의 자백밖에 없으며 그 또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어떤 뚜렷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조사하는 듀란 보좌는 그라이언 보좌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다른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어찌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로와탄은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모두를 물리고 듀란을 불렀다.
“제롬의 말이 사실이냐?”
로와탄의 말은 무거웠으며 떨렸다. 무릎을 꿇고 있는 듀란은 아무 말이 없다.
“제롬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어서 대답을 못 할까?”
듀란은 고개를 들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폐하. 제롬은 그라이언과 한패이거늘, 어찌 그의 말을 믿습니까? 화살을 쏜 병사는 분명 그라이언의 부대원이며 혼자서 어찌 그런 큰일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라이언은 왕을 계승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고 모두가 그렇게 여기고 있는데 그런 무리한 일을 벌이겠는가?”
“바로 그 점이 역모의 동기입니다. 분명 그라이언이 왕이 될 후보 중에 가장 탁월한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두 그렇게 여길 때 왕이 죽어야 자신이 왕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모의 동기입니다.”
“이런 이런. 가능성이 가장 높을 때를 이용해 나를 죽이려 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뉘 앞이라고 지껄이느냐! 그럼 네가 말한 다른 누군가는 바로 너냐?”
로와탄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듀란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듀란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왕이 된 사람이겠죠. 그게 저든 다른 사람이든. 하하하.”
역모에 관한 조사는 마무리되었다. 시에나 방방곡곡에 다음과 같은 담화가 붙었다.
역적 그라이언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의 핵심 수하들과 역모를 모의했다. 5월 5일에 실시된 사냥 대회에서 역적 그라이언은 자신의 병사 에린을 사주하여 폐하가 사냥하는 장소에 몰래 잠입시켜 독이 든 화살을 쏘게 하였다. 다행히 폐하는 다리에 화살을 맞아 역모는 실패로 끝났다. 이후 역적 그라이언은 수하들을 시켜 파옥하고 모수를 건너 모레하라로 도주하였다. 왕비 베아트리체 역시 이 역모에 가담하였고 역모가 실패로 끝나자 자결하였다. 역적 논의를 들었다는 부대원의 증언도 있으며 병사 에린의 집에는 많은 돈과 금이 발견되었다. 아직 잡히지 않은 역적 그라이언을 숨기거나 도와주는 행위를 할 경우 엄히 다스릴 것이다.
- 계엄 사령관 듀란
이 담화를 본 사람들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믿을 수 없다며 반발하기도 하고, 무심한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라이언은 화살을 다듬고 있었다. 요리조리 살펴보고 다시 다듬고 하며 화살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화살의 끝이 살짝 굽어 있었다. 멀리서 부대원 몇이 사냥해온 짐승들을 끌었다. 그리고 한쪽에선 잡아 온 동물의 고기와 가죽을 해체하고 있었다.
“보좌님! 이만하면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일단 준비된 고기와 가죽을 팔아 식량과 필요한 용품을 구입하시죠?”
“아이언 형제! 이곳에선 그런 호칭은 필요가 없네. 오히려 우리의 신분을 노출시킬 수 있으니 형제라고 부르도록 하게. 그리고 나이도 자네가 많으니 나를 그냥 ‘그라이언’이라고 부르게.”
“아직도 습관이 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높임 표현도 버리고 모두가 형제 또는 이름으로 부르며 ‘하오’나 ‘하게’로 말하게.”
“미안하네. 하하하. 어색하오. 하하하.”
“형제여! 준비가 되었으면 아랫마을로 가서 장을 보고 오도록 합시다.”
그라이언은 부대원을 향해 말하고 자신의 활과 화살을 챙겼다. 아이언과 네 명의 부대원은 자신의 활과 화살을 챙기고 장에 팔 고기와 가죽을 짊어졌다. 동굴에 남은 베라와 다섯 명은 오늘 잡아 온 동물의 고기와 가죽 해체 작업의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라이언 일행이 도착한 곳은 작은 마을이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끊임없는 교통의 요지였다. 다양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점에서 정보를 취합하기 적당했다. 오늘도 사람들은 북적이고 여기저기서 물건을 둘러싸고 흥정이 벌어졌다. 그라이언 일행은 평소 물건을 파는 자리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진열했다. 곧 주변 식당에서 달려와 고기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고기는 금세 판매가 되었다. 가죽은 잘 팔리지 않아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사이 그라이언과 아이언은 식당에 가서 요기를 해결하기로 했다.
“쩌그 말이야. 자네, 소식 들었는가? 모수 건너에 있는 고요의 숲 가차운 나라에 역모가 발생했다능마.”
“그~으래. 첨 듣는 야그네. 그래 어떤 역모가 발생했는가?”
“그렇지. 여그는 소식이 좀 늦지. 두 달 전인가 로와탄의 큰 아들이 왕위를 가로챌라고 지 아부지를 죽이려 했다능마. 그라고 둘째 아들이 나서서 수습하고 난리가 아니었네. 그라고 왕비는 자결했다능마. 또 얼마 안되어 로와탄도 독이 든 화살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하네.”
“그려. 참으로 안타깝네. 그놈의 왕이 뭔지..... 아따 저그 파보사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고. 여기저기서 왕 해먹을라고 서로가 쥑이고 난리도 아니네. 허허.”
식당 안의 보따리 장수 두 명이 술잔을 기울이며 주고받는 말이었다. 이 말을 묵묵히 들으며 그라이언과 아이언은 식사를 하다가 왕비 대목에서 그라이언은 밥을 먹다가 뛰쳐나가 구토를 했다. 아이언은 따라가서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라이언은 눈물을 훔치고 식당 앞에 앉았다.
이때였다. 갑자기 무장한 한 무리의 일행이 나타나 일장 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모레하라를 다스리는 헤저드랄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세금을 걷으러 왔다. 세금은 전과 같으니 2시간 안에 대령하거라. 이 식당에서 우리는 식사를 하고 있겠다. 알겠나?”
헤저드랄 일행은 식당 앞에 앉아있는 그라이언과 아이언을 보고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너희도 세금을 내도록 처음이니 특별히 절반만 내거라.”
“우리는 싫은데.”
아이언이 대답했다.
“싫다고? 아직 뜨거운 맛을 아직 보지 못했군.”
헤저드랄 일행 중 한 놈이 칼을 들고 아이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라이언이 화살을 쏘았다. 이번에는 두 놈이 칼을 들고 그라이언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언이 화살을 쏘았고, 나머지는 그라이언이 처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헤저드랄 일행은 주춤하더니 뒤를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아~. 꼬시다. 세금만 뜯어가는 고얀 놈들. 속 시원타. 그라고 두 양반은 수고햤소.”
“그란디, 고놈들이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을 것이구만. 저번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다음날 지들 대장을 데리고 와서 싹 처리하더라구. 근디 어째 이번 판은 달븐 느낌이네. 안 그런가?”
아까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보따리 장수가 말했다.
“이봐, 자네들. 자네들이 벌인 일이니, 자네들이 해결하게. 내일 그놈들이 오면, 다시 대적해주게. 만일 그놈들을 물리쳐준다면 많은 사례를 하겠네.”
“어찌하겠나? 아이언 형제.”
“오랜만에 몸도 풀고 돈도 얻고 좋을 것 같은데, 그라이언.”
“그럼, 산에 있는 형제도 불러와야겠네. 그리고 어떻게 싸울지 준비도 해야겠네. 빨리 준비하세.”
다음날. 아침부터 헤저드랄 패거리가 왔다. 손에는 방패와 칼을 들었다.
“우리는 헤저드랄이다. 어제 우리에게 덤빈 놈들을 넘겨주면 너희는 무사할 것이다.”
화살이 날아와 소리친 놈의 목을 뚫었다. 헤저드랄 패거리는 방패를 들고 방어했다. 이번에는 화살이 방패 옆으로 날아가다 휘어져 방패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패를 들고 있던 헤저드랄 패거리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방패가 무너지자 일제히 화살이 날아왔다. 칼을 든 헤저드랄 패거리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나머지 헤저드랄 패거리는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축하했다. 이 소식은 모레하라 전지역에 퍼져 그라이언의 명성이 알려졌다. 그라이언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점점 세력이 커진 그라이언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야 했다.
“그라이언 형제여. 이곳 모레하라에서는 사냥감도 부족하고 무기를 제작하기도 어렵고 식량을 구하기도 어렵네. 우리를 따르는 이 많은 대원을 감당할 수 없네.”
“아이언 형제여. 그래서 생각한 곳이 있네. 눈의 숲. 그곳은 산악지형이지만 나무가 많아 무기를 제작하기 수월하고, 사냥감도 다양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적을 방어하는데 수월하다는 점이네. 어떤가?”
“그곳에도 기반을 잡은 세력이 있을 텐데 성공할 수 있을까?”
“말이 통하지 않으면 힘으로 눌러야지.”
그라이언은 모레하라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눈의 숲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발하임이라는 나라를 건설하였다. 눈의 숲에는 여러 부족들이 존재했는데 그중에 돌그루라는 부족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매우 호전적이며 주변 부족과 어울리지 못했다. 우수한 무기와 실력 중심의 사회체계를 가진 발하임은 주변 부족과 교류하며 세력을 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하임에 통합되는 부족들이 점차 늘었다. 이제 발하임이 돌그루와 대등한 힘을 갖게 되자, 돌그루와의 일전은 피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전쟁으로 발하임은 돌그루를 제치고 눈의 숲에서 최강자가 되었다. 이때 사망한 인원수는 돌그루 부족 1천 명뿐이었다. 이날 사용한 화살의 수는 1만 개였다. 화살 무기의 종류는 일반 화살 7천 개, 곡살 2천 개, 탄살 1천 개였다. 발하임은 오로지 화살만 사용해 돌그루 부족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만큼 발하임의 화살은 강력했다. 그라이언은 살아남은 돌그루 부족을 포용하여 자치구를 인정하면서도 발하임의 시민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시에나의 왕으로 선출된 듀란은 그라이언과 베아트리체를 지우기 위해 그의 부족 하르센을 노예로 강등시켰다. 로와탄이 지배하던 왕국 시에나는 10년간 평화 시기가 지속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시민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그들의 신분은 노예로 떨어졌고 대신에 보좌가 지닌 권력과 부는 점점 비대해졌다. 사회의 허리를 맡았던 시민계층이 줄어들자 병사의 수도 줄어들어 군사력이 쇠퇴하였다. 궁여지책으로 노예를 병사로 투입했지만, 전쟁 수행 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서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병사의 수를 늘리려고 전쟁을 시작했다. 또한, 듀란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을 선출하는 방식에서 혈족에 의한 승계 방식으로 바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보좌에 대한 권력과 부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시민의 삶은 피폐하고 권력자들의 삶은 풍요로웠다.
듀란과 그라이언이 각자의 지역에서 집권한 후 10년이 지나갔다. 시에나는 주변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자국의 문화만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발하임은 주변국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각자의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돕는 연합국으로 발전하였다. 이 두 나라의 패권 다툼은 시간문제였다. 언제나처럼 커다란 사건은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한다. 리모투 나루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칼루미나의 마지막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뭉게구름이 흐르고 연한 파란색만 보였다. 살랑살랑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라이언은 주둔지의 가장 높은 망루에서 아이언과 함께 적진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수염만이 전쟁의 피곤함을 보여주었다. 그라이언은 돌아가신 어머니 베아트리체를 생각했다. 늘 현명한 판단과 과감한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전쟁도 반드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국가 지도자의 결정으로 희생되어야 하는 병사와 백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웠다.
전쟁은 치정에서 시작되었다. 리모투 나루에 사는 시에나 보좌 오두왈의 첩이 외도를 하다가 발각되었다. 오두왈의 첩과 내연남은 함께 발하임으로 도주하였고 화가 난 오두왈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발하임으로 잠입하였다. 도망친 두 사람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하임 병사와 충돌하여 발하임 병사가 살해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발하임은 살인을 저지른 오두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시에나는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발하임에게 부정을 저지른 두 사람을 죽여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오두왈은 직접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발하임으로 쳐들어가서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발하임의 그라이언은 이는 명백한 전쟁 도발이라고 여기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시에나가 반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초반에 시에나는 많은 병력과 풍부한 물자로 발하임을 압박했다. 발하임의 병사는 뛰어났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병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발하임은 숲을 활용해 특공대를 운용하며 시에나의 후방을 교란하고 전쟁물자 보급을 차단하였다. 전쟁 개시 3개월 만에 발하임 전사자 2천 명, 시에나 전사자 1만 명이 되었다.
“그라이언 폐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궁금한 점이 무엇인가, 아이언 사령관.”
“오두왈의 첩과 내연남을 내어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발하임에 들어온 이상, 그들도 우리 백성일세. 그들을 내어주는 것은 백성을 포기하는 것일 뿐이네.”
“그렇군요. 그래도 막강한 제국 시에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은 무모한 것이 아닐까요?”
그라이언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동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동남쪽은 나의 고향이자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 시에나. 그 시에나의 식민지에서는 참혹한 상황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네. 발하임으로 도망친 오두왈의 첩과 내연남은 리마트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더군. 오두왈은 여자가 자신의 첩이 되는 것을 거부하면 그 마을을 파괴한다고 협박했네. 어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살기 위해 그녀를 오두왈에게 바칠 수밖에 없었지. 약혼남은 절망하고 떠돌다가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지. 절망한 사내는 그녀를 잊지 못해 시에나로 몰래 들어가 그녀와의 밀애를 나눌 수밖에 없었네. 그 둘의 진실한 사랑이 오히려 불순한 사랑으로 손가락질을 받았지. 그런 사연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시에나에 그들을 내어 줄 수는 없었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을 죽이기 위해 발하임을 침범한 시에나의 횡포를 참을 수가 없어 전쟁을 결심했지.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 괴로워 미칠 지경이네.”
아이언은 슬픔으로 가득 찬 그라이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이군요.”
“어서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할 텐데.”
“아참!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신무기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전쟁도 곧 끝나겠군.”
시에나 역시 새로 개발한 무기를 동원하며 막바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에나는 발하임과의 전쟁 중에 식민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식민지 반란을 막기 위해 섬나라 요곤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요곤은 파병하여 식민지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정도 식민지가 안정되자 모든 병력을 발하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발하임과 시에나는 드넓은 초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보병 부대가 앞에 배치되었고, 뒤에 화살 부대가, 그 뒤에 투석 부대가, 그 뒤에 장갑 마차 부대와 이동 타워가 배치되었다. 발하임은 보병 부대가 앞에 배치되었고, 뒤에 화살 부대가 배치되었다.
"병사! 돌진하라.!"
함성과 함께 시에나의 보병 부대가 돌진했다.
"부대! 강활 발사!"
발하임의 화살 부대는 강활을 발사했다. 하늘을 검게 덮으며 날아간 강활이 돌진하는 시에나의 보병 부대에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보병이 쓰러졌다. 개의치 않고 시에나의 보병 부대는 돌진했다.
"부대! 전진하라!"
이번에는 발하임의 보병 부대가 돌진했다. 시에나의 화살이 날아가고 무수한 돌이 날아왔다. 여기저기서 발하임 보병 부대가 쓰러졌지만 개의치 않고 돌진했다. 근접 전투가 시작되었다. 역시 시에나의 보병 부대가 우세했다. 지켜보던 사령관 아이언은 노란색 신호탄을 쏘았다. 여기저기서 노란색 신호탄이 올라갔다. 발하임의 보병 부대는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폭음이 울리면서 배코 포탄이 날아갔다. 포탄을 맞은 시에나의 보병 부대가 날아갔다. 지켜보던 시에나는 장갑 마차를 보냈다. 날아오는 배코 포탄을 뚫고 장갑 마차는 발하임의 보병 부대를 치고 나갔다. 장갑 마차가 멈추자 보병이 나오며 손도끼를 던지며 돌진했다. 발하임의 보병 부대는 손도끼를 맞아 쓰러졌다.
"부대! 후퇴하라! 전원 후퇴하라!"
다가오는 시에나의 보병 부대를 향해 화살 부대는 화살을 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발하임 군대는 후퇴하며 숲으로 들어갔다. 시에나는 투석기를 이용해 불덩이를 숲으로 보냈다. 숲은 이내 불타기 시작했다. 발하임의 모든 부대는 급히 퇴각해야만 했다.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아이언 사령관! 지금 전황이 어떤가?”
“보병 부대의 손실이 심각합니다. 아직 화살 부대는 건재합니다.”
“이제부터 보병 부대는 뒤로 물리고 화살 부대를 내세워 싸우도록 하시오. 화살은 곡살과 탄살 그리고 쇠활을 이용하여 적의 보병 부대를 밀어내고 만일 밀린다면 다시 배코 폭탄을 사용하시오. 시에나의 보병 부대가 물러나면 강활을 사용하여 더 밀어내게. 보병 부대가 밀려나면 현무를 사용해 적의 본진을 초토화시켜 이 전쟁을 반드시 끝내야 하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숲의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부대! 돌진하라!"
시에나의 보병 부대는 이동 타워를 타고 발하임의 본진으로 다가왔다. 발하임의 화살 부대는 곡살을 쏘았다. 타워 안에 있는 보병들이 화살을 맞고 타워에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탄살과 쇠활을 쏘며 전진했다. 쇠활은 방패를 뚫고 적을 쓰러뜨렸다.
"부대! 모든 화살을 발사하라!"
방패가 뚫리자 발하임은 곡살과 탄살을 쏘며 전진했다. 시에나에서 빨간색 신호탄이 울리자 시에나의 화살 부대가 화살을 쏘며 전진했다. 그러자 발하임 쪽에서 배코 포탄이 날아왔다. 시에나의 보병 부대와 화살 부대가 쓰러졌다. 이번에는 파란색 신호탄이 올라왔다. 시에나 보병 부대가 물러나기 시작했고, 발하임 화살 부대로 돌들이 날아왔다. 발하임 화살 부대는 전진하지 않고 강활을 쏘았다.
"부대! 대기하라!"
아이언 사령관은 검은색 신호탄을 쏘았다. 이때 시에나의 본진을 향해 발하임에서 현무 포탄이 날아갔다. 떨어지는 포탄에 시에나 본진은 아비규환의 상황에 이르렀다. 현무 포탄은 10분 동안 떨어졌다. 시에나 본진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포탄 한 발이 본진을 넘어 날아갔다. 시에나 본토로 날아간 누클리어 포탄은 듀란이 머무는 궁 앞에 떨어졌다.
시에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이후 시에나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동요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다. 듀란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보좌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합종연횡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식민지에서는 요곤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식민지는 독립을 요구하며 내전을 시작했다. 발하임과의 전쟁이 끝난 지 5년 만에 시에나는 식민지를 모두 잃어버린 초라한 국가가 되었다. 발하임은 전쟁이 끝나자 문화를 발달시키고 실용적인 기술개발에 힘쓰며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시에나와의 전쟁이 끝나고 5년이 되자, 그라이언은 모든 권한과 임무를 아이언에게 넘기고 홀로 시에나로 떠났다.
<끝>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부분은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차용함.
전투 장면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많은 영향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