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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Oct 21. 2023

겨울나기

   춥다. 연말 닷새 전, 12월 31일이 유효기간인 티켓 두 장을 우편으로 받았다. 부암동 소재 사립박물관의 초대장을 주머니에 넣고 한 해의 마지막 날 도심 속 한적한 골목길을 발길 닿는 대로 터덜거릴 것이다. 경복궁에서 내려 걸어가나. 차창 밖으로 청와대 주변 풍경을 담으며 지나는 마을버스를 탈까. 요런 고민만으로 하루를 살고 싶다고 과한 욕심을 맘껏 부려본다. 꼴값! 새해가 눈앞인 지금껏 겨울나기 준비도 못 끝냈으면서. 

   서울 외곽 작은 도시 나 사는 동네 주변에는 마을과 외따로인 농가 주택이 꽤 많다. 벌판 가운데 사방이 뻥 뚫려 더 추워서 겨울이 이르게 오는 걸까. 위도상 북쪽인 춘천이나 남쪽인 청양과 기온이 엇비슷하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닌 나의 겨울나기란 10월 초를 넘어가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말만 거창할 뿐 남 보기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일들인데 나 홀로 각별하다고 애써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고 싶은 걸 어쩌랴. 더러는 호들갑 그만 떨라고 눈총께나 받겠다.    

  

   그렇게 오래도 아닌 4~50여 년 전 아버지 월급날 날 엄마는 두 말없이 쌀부터 한 가마니 들여놓고는 한 달 걱정 덜었다며 뿌듯해하셨다. 다음은 연탄, 여덟 식구가 추운 계절 따듯이 나려면 오백 장쯤 필요한데 100장 정도밖에 들여놓지 못했다. 이번 겨울 지난 3년간 코로나-19에 이은 동유럽전쟁 여파로 에너지값이 많이 올랐다. 난방유와 LPG 가게에 전화 두 통을 걸어 기본 겨울나기를 마무리했다. 퍼뜩 드는 생각, 그때보다 편리하고 많아서 우린 행복한가.

   악양 하동행은 연례행사다. 대봉감 400여 개를 사서 몇 군데 보내주고 나머지는 북서쪽 차가운 창고 방에 쟁여놨다. 올해는 숫자가 되어 2월 중순까지 너끈히 먹고 남겠다. 1월 말 전에 감이 떨어져 속을 끓였던 터라 넉넉히 샀다. 흰색 요구르트 위에 감과 블루베리를 올려 만드는 하양, 주홍과 보라의 화려한 색깔 조합이 내 눈에는 예술이다. 아침마다 보는 똑같은 음식이 질리지도 않고. 감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그깟 거, 레시피 포함 인심 팍팍 쓸 것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말로만 처리하겠다며 차일피일 시간만 끄는 나를 혼내줄 생각이었던지 밤새 함박눈이 급거 내려오셨다. 수도관이 얼어 터지기 전에 텃밭 가운데 설치한 수도꼭지와 계량기 먼저 정리하기로 했다. 기계치에 일 품새 없는 내가 그 일을 마무리하기까지 꼬박 두 시간 걸렸다. 수도를 설치했던 아저씨에게 전화로 묻고 짜증을 부렸다. 온갖 일 혼자 다 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으로 검불로 범벅이었고.

   난리 났다. 이쁜이가 전화를 걸어 알려준다. 관절염에다 온몸이 아파서 김장을 포기했다고. 서너 해 전부터 이 집 김치만 먹어온 우리는 어쩌라고! 어쩌긴? 나의 삼재는 지난해 끝났고 며칠 지나자 말짱 해결됐지. “여유 있게 담갔어. 한가할 때 들러.”라는 고마운 전화가 그리고 나중에 이쁜이네가 자기 먹을 김치 만들면서 우리 몫까지 더 했다는 소식이 겹쳤다. 복이란 복 다 받을 분들이다. 

   4년쯤 전 고등학교 후배께서 귤 농장을 운영하는 제주 지인 얘기를 동문 밴드에 소개했다. 관심을 끈 대목은 ‘노지 재배 무농약 귤’, 웬만한 과일 껍질의 영양소 함유량은 과육보다 최대 5배쯤이다. 문자를 보냈다. 크기와 생김새가 고르지 않고 반점투성이인 귤 한 상자가 다음날 도착했다.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껍데기와 과육을 통으로 썰어 끓인 다음 유리병에 담는다. 토스트 위에 녹아내린 모차렐라 치즈와 함께 겨울철 입맛을 북돋울 특별한 잼이다.

   생쥐네 일당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올겨울에도 우리 집 천장을 밤낮없이 내달릴 것이다. 요것들이 오가는 길목에 미리 쥐약을 놨어야 했는데. 뒷집 고양이한테 먹거리 좀 내놓고 살살 꼬드겨서 남의 공간을 제집인 양 드나드는 서생원 일족 감시나 부탁해둘걸. 2년 주기로 연말 무렵이면 집안에 숨어드는 뱀도 문제다. 책상 뒤 가국현 화백의 꽃 그림 액자 좁은 틀 위에 세상 편한 자세로 요염하게 누워있다. 작년엔 건너뛰었으니 올겨울에 찾아올 확률이 높다.      


   부암동(附岩洞)사무소 앞에서 부암의 유래를 쫓아가 본다. 근처 자하문에서 세검정 가는 길에 ‘부침바위’라는 돌덩이가 서 있었고, 여인네가 자기 나이 수만큼 바위 경사면에 잘생긴 돌을 문질러 홈을 판 다음 손을 떼서 찰싹 달라붙으면 옥동자를 낳는다던... 턱없는 남아 선호 관습의 시대적 부산물이다. 뭇 여인들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바위는 그 동네 어디서도 볼 수 없고 길 건너편의 멋대가리 없는 양철 안내판 하나가 멀뚱멀뚱 옛 얘기를 전한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전봇대에 매달린 화살표 팻말이 박물관까지 500m라고 알려준다. 멀지 않으나 오르막 경사가 만만치 않아 숨이 차다. 마스크 속을 휘돈 콧김이 뿌옇게 안경을 가린다. 여염집 담장 위로 진회색 솜뭉치가 올라왔다. 목련 봉오리 옆 파릇파릇한 저 망울은 확실히 진달랜데, 벌써? 우리 집 쥐새끼처럼 꽃뱀처럼, 부암동 한옥 뜰에 웅크려 앉아 다가올 계절을 꿈꾸는 그들. 아직도 못 끝난 나의 겨울준비. 초조하다. 맞바람이 인다. 여전히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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