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 즈음이면 가난한 집 부잣집 할 것 없이 처마 밑에 무시래기 단이 줄줄이 내걸렸다. 퍼런 무청을 새끼로 탄탄히 엮어 햇빛 적고 바람 잘 통하는 그늘막에 가지런히 널었다. 김장 끝 떨궈진 푸성귀 쪼가리까지 죄다 시래기로 탈바꿈했고 그쯤에야 산골짝의 겨울 채비도 얼추 끝나갔다. 퍼렁이 누렁으로 변하면서 겨우내 국으로 찌개로 갖은양념 버무린 무침으로 밥상에 올랐다. 꼬맹이 입엔 텁텁하고 퀴퀴했던 풀떼기를 어른들은 맛있다며 잘도 드셨다.
양쪽의 야산 중간으로 늘어선 농경지가 동서로 길게 뻗었다. 구부정하던 지방하천 정비 작업이 끝나면서 개울가를 서성거리는 짐승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풀숲도 무성해졌고 수확 끝난 순서로 시작된 흙덮기 사업은 12월까지 이어졌다. 시청 재원이 투입됐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 예정이라는 소문으로 탈바꿈하여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실이 뭐든 몇 해 전 농지 서쪽 끝에 들어선 도예촌까지 왕복 십 리 넘는 산책로를 덤으로 얻은 나는 신났다.
저녁을 먹고 논 한복판 개울가 나의 산책길로 나선다. 춥다. 사람도 없다. 풀 덮인 개울 바닥에서 뭔가 냅다 튀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본다. 송아지 크기 짐승 몇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허허벌판으로 내달린다. 생김새로 보면 고라니가 틀림없다. 오랜 기간의 포획금지 조치로 수가 불어난 짐승들이 먹이 찾아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산으로 돌아가다 한길에서 차량에 치이면 어쩌나, 시답잖은 걱정이 꿈틀댄다. 걸음을 멈추고 멀리 집 뒤뜰을 바라본다.
김장철 장터에 산내끼로 꽁꽁 엮은 무청이 널려있었다. 일단 값은 쌌다. 서너 단을 집어 들었다. 전통을 되살려 보겠다거나 시래기국을 끓여 먹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어릴 적 본대로 바람 잘 통하는 응달에 매달아 놓고 오가며 바라보는 재미쯤은 생각했다. 아련한 옛사랑도 아닌, 유년 시절의 추억에 휘말려 결정한 충동적 구매행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러고 싶었다.
어릴 적 어른들의 작업 방식을 떠올리며 부엌 창 바깥벽에 무시래기를 매달았다. 필요한 만큼의 바람과 햇빛과 습기를 담아서 영양가 풍부한 먹거리로 변해 갈 게다. 인터넷을 뒤져 조리 방법도 알아보고 누구든 달라는 사람한텐 선선히 내줘야지.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이 두 달 넘게 계속되었다. 소한(小寒)이 목전이던 한겨울 새벽, 집 뒷벽을 퍽퍽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나 왔노라 친절하게 신고할 도둑은 이 세상에 없다. 손님이면 대문으로 왔을 테고, 새벽 댓바람에 이장님 행차일 리도 없다. 괭이 걸음으로 조용히 다가가 부엌 창문을 슬쩍 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희뿌연 어둠 속에서 어미와 새끼인 듯 짐승 두 마리가 긴 목을 빼 들고 뒷벽을 향해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시래기를 뜯어 먹는 모양이다. 어째야 할지 몰라 한숨이 나온다. 자기들 먹으라고 갖다 놓지 않았는데.
팔짱을 낀 채 긴장한 얼굴로 다가온 아내가 창밖을 살피고는 얼굴이 환해진다.
“고라니네? 세상에... 예쁘기도 해라.”
“뭐가 예뻐? 세상 예쁜 거 다 말라 뒈졌겠네!”
“귀엽잖아. 내 걱정도 덜어주고. 실컷 먹게 놔둡시다. 내일 또 오게.”
이해는 간다. 계량 수저 없이는 음식 간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라.
돌아보면 꼭 무청을 먹겠다는 목적은 아니었으니 그것도 괜찮다. 놔두면 어차피 쓰레기로 변할 시래기라 아까울 것 없고. 허겁지겁 뜯어먹는 두 도둑님의 마른 등짝 위로 하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무청의 임자는 당초 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고라니가 알아채지 못하게,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숨죽이고 바라본다. 그림자 새나갈라, 부엌 불까지 꺼둔 채로.
눈(雪)다운 눈이 흠뻑 오지 않았을 뿐 올 날씨는 지난 몇 해보다 훨씬 겨울답다. 설 전후 한두 번 몰아닥칠 혹한을 걱정하면서 추위는 이쯤에서 끝이기를, 함박눈이나 펑펑 내리기를 바란다. 눈이 많이 와야 풍년이라더라. 하얀 눈이 산과 들을 뒤덮으면 배고파 헤맬 짐승들이 먹거리를 찾아 우리 집 주변도 기웃대지 않겠나. 괜히 우쭐하다가 짐짓 머쓱하다. 농가 주변 어디나 널린 시래기 몇 단조차 챙겨두지 않은 사람이 생각만 넘치고 말로만 너그럽다.
겨울이 한참인 정월 초, 수북이 쌓인 잡풀 아래 연초록 새싹이 돋았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혼란하고 고되어도 자연은 순리대로 흘러가며 계절도 때 되면 알아서 다가온다. 무더운 여름 나고 김장철이 되면 한 아름 무청을 구해 뒤뜰 응달 지붕 밑에 얼기설기 걸어놔야지. 입 짧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고라니 가족이 휑한 들판 검푸른 어둠을 뚫고 새벽녘 찬바람 헤치며 찾아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