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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있는 무대 May 27. 2020

믿던 세상이 무너질 때

무너져야 보이는 것들

사람은 크고 작게 자기만의 사회 속에 속한다.  가족이 세상의 전부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온 마을을 다 신경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국가의 문제를 자신의 1 신념으로 두는 사람도 있고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는 의협심 강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삼삼오오 한 자리에 모여있어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사회의 범위는 다르다. 한 사람에 인정받는 것으로 흡족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집단 전체에 최고 소리를 들어야 다행이라고 안심하는 이가 있지 않은가.


사람은 그렇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신념도 세우고 관계도 맺고 먹고 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기다. 평온하고 문제없이 그저 지금보다 아주 조금 나아지면 소원이 없겠다 싶다. 아니, 지금처럼만 계속해서 지내도 좋겠다 싶지만 문제는 늘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진다.


신념이 강할수록 신념이 무너질만한 상황이 생기는 것(신념은 신앙과 비슷하기도 한다.)이나 믿었던 사람에게서 예측하지 못한 반응으로 크게 당황하는 일. 평소에 베풀고 나누어 주면서 살아온 선의에 뒤통수 당하는 일을 겪고 나면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내가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그때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걸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등등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망연자실뿐이다. 이때 감정은 밑바닥의 죽음까지 내려간다.


아주 오래간 지키고 세워왔던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정신 차릴 때쯤 무너져야 보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신념이 무너져도 죽지는 않고 진실로 믿었던 그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도 삶의 이유는 여러 갈래로 나를 지키고 있다는 현실 말이다.


배우자의 외도, 종교 지도자의 성범죄, 정치 지도자들의 비리, 믿었던 친구의 험담 등 의지하고 믿었던 기둥들이 약하고 한낱 바람 같다는 사실 말이다. 트라우마라고도 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이들은 한동안 괴로워하다가 인생의 허무주의로 빠지기도 한다. 자신을 지켜온 것들러부터 내팽겨질 때의 처절함이 낯설기 때문일 것이라.


약한 것들에 기대 내 존재를 의지하려 했으나 이제는 홀로 서기 시작한다. 홀로 살지만 함께 사는 세상이 보일 것이다.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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