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근무했던 회사에는 나랑 아주 말이 잘 통하는 남자동료가 한 명 있었다.
나보다 세 살 많았는데 어찌나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말재주가 좋은지 우리는 날씨가 좋고 한가한 날이면 커피를 한잔씩 들고 옥상에 올라가서 퇴근시간이 다되도록 수다를 떨기도 했다.
사회문제, 정치문제, 초자연적 현상까지 어떤 분야든 각자의 관점에서 느끼는 의견을 나눴는데 그날의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나만 그런 건지 다른 여자들도 같을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사랑을 시작하면 마음에 큰 방을 하나 만들어. 그리곤 그 방안을 그 사람과의 추억으로 꾸미기 시작하는 거야. 기억 하나하나를 가지고 어디가 예쁠까 여기에도 놔보고 저기에도 놔보고 하면서. 아주 방이 꽉 찰 때까지. 그러다 그 사랑이 끝나면 그 방을 청소하는 거야. 깨끗하게 싸악 치워놓고 다른 사람을 맞을 준비를 시작하는 거지.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잖아. 이번은 달라서 시간이 지나도 이 방을 치울 수가 없어. 몇 년이 지나도 하나같이 다 너무 소중해서 버릴 수가 없거든. 치워지지가 않으니 다른 걸로 채울 수가 없지.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방 한구석에 안 보이도록 숨겨 놓는 거야. 훗날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겠지. '다른 흔적들은 다 치웠는데 너만 이렇게 남은 걸 보니 네가 나의 가장 큰 사랑이었구나. 그만큼 큰 사랑을 해본 건 처음이었으니 네가 바로 나의 첫사랑이 맞구나.'라고."
여자의 첫사랑에 대한 내 얘기에
그 동료가 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태껏 기억하게 되는 남자의 방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남자에게는 하나의 큰 방이 아니라 작지만 여러 개의 방이 있어. 여자처럼 방을 싹 치워내고 다른 사람을 맞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 또 옆에 새로 방을 만들어서 새로 채우는 거지. 그리고 방문 앞에 이름표를 달아주는 거다. ○○○, □□□, △△△, .. 시간이 많이 흘러 그 문을 한 번씩 열어보고 싶을 때가 있어. 오늘 갑자기 ○○○ 생각이 나네 싶으면 그 이름표가 달린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거야. 천천히 둘러보면서 먼지가 쌓여있으면 좀 털어내주기도 하고, 좋았었는데 혼잣말도 해보고. 또 며칠 뒤에 △△△ 생각이 나면 이번엔 그 아이의 방의 문을 열면 돼. 모든 사람의 방을 다 만드는 것은 아니야. 기억하고 싶은 몇 명에 한해서야. 그러면 첫사랑의 방은 어디 있냐? 당연히 맨 앞이야. 이름표 색깔도 다른 애들이랑은 달라. 왜? 그 아이 때문에 방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잖아. 그러니 특별하지. 처음 해본 사랑. 남자에겐 그게 첫사랑이야."
내 과거의 첫사랑과 현재의 첫사랑.
1000여 일 정도 많은 사랑은 퍼부어주다 돌연 상처를 주고 떠났던 그 둘의 마음속에도 내 이름이 걸린 방이 있을까?
그들이 가끔 내 방의 문을 열어봐 줄지 궁금할 때가 있다.
오빠가 나를 찾아온 건 전남편을 만난 지 두 달쯤 되어갈 때였다.
찾아오기 며칠 전 깊은 새벽에 전화가 먼저 걸려왔었다. 깜짝 놀랐다.
자다가 벨이 울려서 놀란 것이 아니라 지난 몇 달 동안 밤이면 밤마다 잠도 못 이루고 울며 기다리던 그 전화인데. 간절히 기다리는 전화가 내게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다.
오빠는 술에 취해 미안하고 보고 싶다며 다시 나에게 오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생겨서 너무 늦어버렸다고 냉정하게 답했다.
전화를 끊고 아침이 오도록 밤새 울었고, 그 통화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부터 오빠는 낮이고 밤이고 전화를 해댔고, 전남편과 같이 있느라 전화를 안 받으면 무작정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나와 마주치는 기회를 얻으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안 되겠냐고 빌면서 다시 만나자고 애원했다.
회사로 내 키만 한 곰인형과 꽃을 보냈고, 중사로 진급한 후로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편지를 수 통 써서 매일 우체통에 직접 넣으며 간절함을 보였다.
말은 냉정하게 했지만 가슴이 한켠이 찢어졌다.
벌써 몇 주째 집 앞을 서성이는 오빠에게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서 잠깐 만나자고 했다.
"나 9월에 결혼해."
복수를 한 것 같았다.
8살 많은 아무 감정 없는 새 남자친구에게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몇 달간 끌어안고 울었던 그 많은 상처 덩어리를 고스란히 안은채 오빠를 만나 다시 사랑하고 행복했던 때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내 머릿속을 강제로 비워버리지 않는 한 앞으로 아무리 나에게 잘해준다 한들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날 매몰차게 대하던 그 모습이 잊혀질 리 없었고, 시간이 지나서 그런 상황이 또 올 것 같아 무서웠다.
그 무서움에는 그럴법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새아빠와 엄마를 통해 간접 경험을 했었다.
바람났던 여자에게 버림받고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남자를 버선발로 맞아주던 엄마 같은 여자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나의 결혼을 친척들, 친구들 뿐 아니라 날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뒤집을 수가 없었다.
복수가 될 줄 알았지만, 결국 이루고 말았다는 후련함이나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거나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 날짜가 바짝 다가올수록 괴로운 건 나였다. 결혼하면 그때서야 진짜로 영원한 이별이 되겠구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혼이 미치도록 하기 싫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날짜만이라도 미뤄서 시간을 끌고 싶었지만 엄마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복수의 칼은 방향만 오빠를 향해있을 뿐이었지 결국 찔린 것은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