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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May 26. 2019

내 안의 아직 성장하지 못한 아이

MBC 꾸러기식사교실을 보다 불안해졌다

며칠째 아침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 피곤하거나 무거운 몸을 느끼며, 일 가기 싫다, 일어나기 싫다,라는 생각으로 아침을 연다)

피곤해하는 남편과 대조적으로 나는 웬일인지 컨디션이 꽤 좋았다.


오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제주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내가 문득 다시 새롭게 느껴졌다.

오늘은 간단하고 가볍게 점심 식사를 해야지 하고,

김밥을 사고, 저녁식사 메뉴를 위한 장을 봐서 집을 향해 걸었다. 이 영화같이 진부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친구에게 온 휴대폰 속 메시지가 반가워 답장도 하고, 곧 제주에 오겠노라 약속한 친언니에게 일정을 상의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문득

도로에 지나다니던 차들이 잠시 멈춘 사이,

고요한 공간감을 느낀 순간, 새소리가 하모니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미소가 났다.


불안은 아무 때에나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


집에 와 TV를 켰다.

채널도 돌리지 않고 장 본 것을 정리하고,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네 살 남자아이가 등장했다.

낮동안 할머니가 아이를 봐주었는데, 할머니의 고민은 아이가 밥을 안 먹는 것, 그리고 손가락을 심하게 빨아 아이의 치아와 손가락이 변형되어 가는 것이었다. 유아 행동 교정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주는 형식의 유아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예전에 즐겨보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과 비슷한 형태였다. 나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든지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처럼 어린이나 반려견의 심리를 분석하고, 교육으로 인한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프로그램에 눈을 떼지 못하는 편이다.


홀린 듯 시청을 하던 나는 어느 순간,

휴대폰에 온 메시지를 흘깃 보고는 급격히 기분이 나빠진 걸 느꼈다.

특별히 기분 나쁜 메시지는 아니었다.

좀 전까지 즐겁게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하던 친구와 언니의 답장이 시간차를 두고 와있던 것이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나는 갑자기 이런 연락들이 갑갑하고,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메시지 속 말들을 비꼬아 받아들였다. 알아서 하지, 뭐 이런 걸 물어본담, 헌데 어랏,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과거에 주로 내가 생각하던 방식이었다.


모든 일과 모든 사람을 나는 이 부정적 필터를 통과해 받아들였었다.

'왜 저러지, 알아서 못하나, 이것까지 물어보다니, 귀찮으니까 나한테 떠넘기는구나'라는 생각들, 피해의식이 강했지만, 이와 달리 답변은 아주 친절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 식사 시간이 늦어져 배가 고파서 그런 걸까,

나는 배고파지면 아주 예민해지는 편이니까.

일단 휴대폰 메시지를 무시하고

식사를 마쳤다.


TV 속 아이는 밥에 도무지 흥미가 없었다.

식탁에 앉히기도 어려웠고, 모든 반찬을 거부했고, 할머니는 쫓아다니며 밥을 먹였고, 국에 밥을 말아 떠 먹여줘야 간신히 한 숟가락 받아먹었는데, 국의 건더기도 먹지 않았다. 맨밥만 겨우 먹는 아이였다.

아휴, 아이 키우는 것이 어디 쉽나.

아이를 안쓰러워하는 할머니가 애처로워 보였다. 꼬맹이가 얄밉게 보였다.


아이의 두 번째 문제점이 등장했을 때, 나의 반응은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랏 나 어렸을 때랑 똑같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헛.

그리곤 뻔한 거 아니야, 손가락 빠는 거 결핍의 문제잖아,라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엄지손가락을 계속해서 빨았다. TV 볼 때나 잠들기 전, 틈만 나면 입안으로 엄지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다 아이가 손을 빨며 현관 입구에 가 처량하게 앉았다. 할머니가 물었다. "엄마 기다리는 거야?" 아이가 손가락을 입에 문채 웅얼거렸다. "응웅"


나는 거의 중학생 때까지 손가락을 빠는 버릇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에도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슬며시 손가락을 입에 물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니기 전보다 더 어렸을 때의 기억 중 하나가 손가락을 빠는 거였다.

엄마 아빠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실 때였다. 나는 시장 한 편의 이불가게에서 가게 앞에 쌓아둔 이불 사이로 얼굴부터 배까지 상체를 쑥 짚어 넣고, 손가락을 빨았다. 그런 나를 엄마가 찾아내 재밌어하며 나를 데려갔는데,

그 이후나 시장에서 내가 우리 가게에서 어떻게 있었는지, 뭘 하며 놀았는지, 그 시절의 다른 기억은 전혀 없다.

다만 손가락을 입에 물고 이불속에 있던 아늑하고 안정정적인 느낌은 기억이 난다. 잘 때면 늘 오른쪽 엄지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그래야만 잠이 왔다.


그제야 저 TV 속 꼬맹이와 나의 과거 꼬맹이 시절이 똑같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렸을 때 밥을 잘 먹지 않는 아이였다.

반찬투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냥 밥상 자체를 거부했다. 밥을 먹으라 차려주면 온갖 짜증을 내는 아이였다.

차이가 있다면, 엄마나 아빠가 따라다니면서 먹여주던 기억은 없었다. 다만 짜증을 내다 제풀에 지쳐 울며 억지로 밥을 조금 먹거나 아예 굶었다.


전문가가 등장했다.

밥을 안 먹는 아이를 위해서 식재료와 친해지고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놀이치료와 이색적인 메뉴를 추천해주었다.

손가락을 빠는 행동은 아이가 불안감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 했다.

아이가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  

할머니와 함께 아이의 부모가 등장했다. 주말엔 시간을 내 함께 소풍을 나가라 했다.

할머니는 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주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번갈아 안아주는 놀이를 하며 아이와 친밀감을 쌓았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처방이 없었다.

생계 때문에 언제나 바빴던 부모는 세심하지 않았다. 엄마와의 유대감은 지나치게 긴밀했고, 아빠는 지나치게 무심했다. 나는 엄마의 힘겨움까지 떠안았고 대신 처리하려 들었다, 아빠의 무심함에는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엄마는 아빠로부터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처방이 없던 불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랐던 아이는 불안을 억누르며 성인이 됐다.

자신이 불안한지도 모르고 서른을 넘겼다.


무의식에 있는 불안을 자극당하면,

여러 가지 형태로 분출된다. 기분이 나쁘다,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 느낌이 좋지 않다, 두렵다 등.

주로 ‘회피’의 방어기제를 써온 나는 휴대폰 메시지가 보기 싫어지고, 그 내용조차 꼬아서 해석하며 뾰족한 끝으로 스스로를 찔렀다. 거기에 또 기분이 왜 이럴까, 자책까지 더해졌고, 좋던 기분을 망치고 우울하고 싶지 않은데, 하는 강박까지 고개를 들며, 점점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허기졌던 배는 이미 채워진 후였지만, 나는 무언가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가만있어보자, 아아, 이유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 같았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며 불안해하는 TV 속 아이의 모습은 어린 시절 나를 떠올리게 했고,

그때 느꼈던 정체모를 나의 불안이 성인이 된 지금도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리라,

잊고 있던 감각들이 피어오르려 하자

나는 무의식 중에 즉각적으로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다.


기분 나쁜 순간을 캐치해 내다니!

그 와중에 나는 내가 좀 대견스러워졌다.


나는 불교, 명상, 수행에서 늘 가장 먼저 강조하는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단계이다.

사물을 판단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그리고 일어나는 생각들을 알아차릴 것,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해보자고 여겼다.

하지만 생각을 섞지 않고, 단순히 인식할 수 있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여태껏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을 해왔던 나에겐 판단하는 일은 피부처럼 내 생각에 들러붙은 행동이었다.


그동안 이런 식으로 이유 모르게

급격히 나빠진 기분을 나는

가까운 가족에게 확 날카롭게 대답하거나, 혼자 괜스레 울거나 하는 등의 감정의 극으로 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출되는 형태로 나타냈었다. 남편에게 나는 예민한 사람, 갑자기 날카로운 칼날로 뱐하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해서 스스로 기분을 감지하고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의 단계에 지금은 만족할 수 있다.


이제 이후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지,

난감하긴 하다. 명상 수업에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수행해 봐야 하겠지만, 그다음 나아가는 걸음이 아직은 힘겹기만 하다. 그래도 알아차림만으로도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이론은 어느정도 도움을 준다. 불안을 감추거나 억누르지 말고 다시금 느끼라 했다.

어린 시절의 커다랗던 결핍의 감정들은 지금에서야 채운다고 다 메워지긴 어려운 일이다, 대신

불안 속에 있는 방법, 그 안에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불안해도 기분이 나빠도 살아갈 수 있게 앞으로 걸을 수 있게, 너무 힘들면 웅크리고 버틸 수 있게 새로운 방식을 터득해야 한다.

나의 불안을 바라보기로 한다.

그리고 한 켠엔 안도한다.

앞으로 걸을 길에 끝이 안 보여도, 여기까지 걸어온 길만해도 꽤 먼 거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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