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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73일

by 은은


天籟初無聲(천뢰초무성) 우주라는 악기엔 소리 없는데

散作萬竅鳴(산작만규명) 천지의 구멍들 울려 음악이 되네

孤桐本自靜(고동본자정) 오동은 본래 고요하지만

假物成摐琤(가물혹창쟁) 명주실 매어 둥기둥 소리 나네

我愛素琴上(아애소금상) 나는 줄 없는 거문고를 사랑하여

一曲流水淸(일곡류수청) 맑은 시냇물 노래를 타네

不要知音聞(불요지음문) *지음(知音)이 듣는 것도 바라지 않고

不忌俗耳聽(불기속이청) 속물이 듣는 것도 꺼리지 않네

只爲寫我情(지위사아정) 그저 내 마음을 쏟아

聊弄一再行(뇨농일재행) 애오라지 한두 줄 뚱겨 본다네

曲終又靜默(곡종우정묵) 곡이 끝나면 또 고요히 침묵하니

敻與古意冥(현여고의명) 아득히 옛사람의 뜻과 맞네

이규보(李奎報,1168~1241)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박한 거문고를 읊다[소금(素琴)]>

*지음(知音): 소리를 알다,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벗


문득 하루의 시작을 저음의 일관된 자동차 소음이 아닌 맑은 새소리와 계곡물 소리로 수놓을 수 있다면 출근길 우리의 마음은 조금 더 따뜻하고 평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빨리 도로를 바삐 가로지르는 자동차 소리를 자연의 소리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교육원 4기 생활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가물가물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힘들었던 기억은 희미하게 떠오르긴 하나 한주 한주가 다양한 사건의 연속인데다 순간의 상황에 몰입하고 놓아버리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곧잘 잊어버리곤 해서 그런가 봅니다.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 대해 미움이 들었던 몸과 마음이 시간이 지나며 정화되고 희석되어 좋은 기억만 떠오르게 되기도 합니다. 망각의 힘이겠지요. 같은 일을 네 번째 반복하면 무뎌지고 버티어내는 힘이 길러지나 봅니다.


오늘 소개할 시의 소재는 ‘거문고’입니다. 십여년 전 대학원 시절에 수업만 듣기가 무료해서 창경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거문고 수업을 일주일에 한 번씩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 1년 반을 꾸준히 다녔었는데 지금은 연주하는 법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거문고는 그 묵직한 저음만큼 선비들의 마음 수양에도 많이 애용되어 왔습니다. 정악은 바르고 곧은 소리라 지루하고 무료한 감이 드는 반면 산조(散調)는 변주와 기교로 인해 연주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어젯밤 밤하늘의 반달이 바로 누워있지 않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새카만 밤하늘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우주라는 악기’는 고요하기만 할 뿐 본래 소리가 없습니다. 공기의 움직임으로 인해 온갖 소리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숲속을 거닐면 숲속의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걸으며 자연과의 ‘말없는’ 대화를 합니다. 계곡을 따라 걸으며 맑은 시냇물 소리, 산새 소리를 듣고 말없이 피어 있는 꽃과 나무와 인사를 나눕니다.


시인은 그 자신이 예민한 악기가 되어 우주 대자연의 섭리를 대신 들려주는 사람입니다. 시인이 얼마나 예민하게 우주 지성의 소리를 경청하고 연주해 낼 수 있느냐에 따라 세상에 끼치는 울림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이는 나를 비워내는 마음 수양의 크기와도 비례합니다.


여러분은 나와 너, 우리, 우주 삼라만상에 어떤 소리를 들려주고 싶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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