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6. 일. 27월.
1. 어젯밤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빠가 잠들었다고 해서 통화를 못했다. 아빠가 잠들어있어도 엄마는 거의 아빠의 손 닿는 반경 안에 대기 중이고, 그렇게 가까이서 통화를 하다가 아빠 잠이 깰 수도 있으니 통화를 할 수 없다.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엄마의 시간은 아픈 아빠를 중심으로 흘러간 지 오래다.
아침에 출근해서 다시 전화를 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는다. 전화통화가 어려운 아빠를 대신해 엄마의 핸드폰뿐 아니라 아빠의 핸드폰도 늘 가까이 두고 있는 엄마는 성당 갔을 때 이외에는 통화가 안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겨우 두 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기고도 나는 불안해졌다. 계속 핸드폰을 보게 된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 이렇게 엄마 전화를 기다려 본 적이 있었던가.
기다리다 결국 다시 전화를 했다. 엄마는 지금 퇴원한다고 했다. 아빠가 퇴원하고 싶어 한다고. 몸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자 어제 우리가 집에 간 후로 계속 토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어도 병원에서도 바로바로 조치를 취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토에 담즙 같은 검은액이 섞여 나오자 병원에서는 내시경을 받아보기를 권했다고 한다. 내시경도 처음부터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내내 안 해주다가 떠날 때가 되니 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게다가 병원을 의심하고 있는 아빠가 내시경을 받을 리가 만무했다.
2. 의사는 퇴원을 요구하는 아빠에게 병원을 나가면 오늘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고 한다. 아마 퇴원을 막으려고 더 강하게 이야기했겠지만, 이미 아빠에게서 신뢰를 잃은 의사의 말은 아무 힘이 없었다. 신뢰를 잃은 정도가 아니라 아빠는 병원이 아빠를 죽이려고 한다고 의심하고 있으니까.
우리에겐 아빠뿐이었으나, 이 병원에는 이미 남은 날의 양이 다를 뿐 아빠와 같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저 '환자 8'같은 위치에서 우리의 고통과 달리 무심한 의사와 간호사의 태도를 기억한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는 '개인, 정체성, 위엄, 존엄'같은 것들이 사치가 된다. 의료진은 '살리는 것'이 중요하고 거기에 집중하기도 힘에 부치는 상황일 거라고 이해해 본다. 그렇게 내가 그들을 일부러 이해하라고 나 스스로를 달래지 않는다면 병원이라는 공간의 무심함에 너무 화가 날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이해해야 했다. 의사는 아빠가 집에 가면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했으나, 병원에서 해주는 것은 수액뿐이었고 그것은 요양보호사인 엄마의 친구도 해줄 수 있는 조치였다.
3. 엄마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빠를 억지로 병원에 있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집에 가고 의사 말대로 된다면, 엄마혼자 아빠의 몸도 마음도, 죽음도 감당하게 되는 거니까. 그래도 엄마는 아빠의 말을 들어줬다.
아빠는 죽을 때까지 멋대로였고, 엄마도 아빠가 죽는 순간까지 아빠를 따라줬다. 그것이 엄마 아빠가 삶을 사는 방식이었고, 죽음 앞이라고 변하지 않는 점이 나는 좋았다. 아빠가 멋대로인 것 마저도.
간호하는 가족들에게는 저마다의 용기가 필요하다. 치료를 함께하든, 포기하게 하든, 그 결정을 지지하는 것도 말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엄마 덕분에 아빠는 스스로의 생사를 결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죽을 장소를 결정할 수 있었다.
4.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날 아빠 퇴원을 돕기 위해 고모들이 병원에 왔다고 한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어서 휠체어로 차까지 이동한 아빠는 엄마를 비키라고 하고 직접 운전석에 올랐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아 정말 끝까지 '아빠답다'. 운전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 운전연습시킬 때 이외에는 무조건 당신이 운전하는 사람. 자동차를 팔고, 고치고,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하며 자식 셋을 키워낸 사람. 아빠는 끝까지 운전대를 남에게 넘기지 않았고 운전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본인 인생의 운전대를 꽉 붙들고 있는 사람. 내가 아빠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점. 아빠를 닮았다는 것 중에 싫어하지 않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도랑에 빠지든 길을 잘못 들든 아빠는 본인의 결정을 믿는다. 운전대를 놓지 않는다. 그 결정에 늘 따라야 했던 딸의 입장에선 늘 그 차에서 내리고 싶었으나,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았다. 아빠만큼 인생을 꽉 붙드는 나를 본다.
하지만 엄마가 아빠의 운전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빠답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빠가 운전하고 온 그 길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빠 돌아가시던 날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운전해 온 길을 다시 걸어 나가지 못했다.
그 날 본 꽃들이 아빠 인생의 마지막 꽃이었다.
아빠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아마 아빠에게는 지독하게 아름다운 장면이었겠지.
지독한 봄이었다.
* 글을 쓰다가 잠시 멀찍이 이 글을 하나의 이미지인 것처럼 바라보는데 아빠의 '빠'들이 글에서 어둡게 눈에 띈다. 아빠에 대한 글이진 하지만, 아빠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들어가 있구나. 내 삶이, 내 글이 아빠로 가득 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