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랑 맨날 붙어 있으면 안 질려? 2

<알> 이 질문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본 것 같다.

by 뇽알

뇽과 나는 같이 살기 전부터 자주 만나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때야 같은 학교여서 평일 내내 봤고, 학교가 달라진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 주말을 함께 했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 등의 각종 ㅇㅇ 데이에는 남들 놀 때 빠지지 않겠다며 챙겨서 만나고, 여행을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다음에는 매년 ‘봄꽃놀이’, ‘단풍놀이’ 정기 일정이 추가되었다. 거기다 명절 연휴가 길어지면 해외여행까지 가서, 24시간 동안 같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겹치는 일정이 많다 보니 다른 친구들, 심지어 가족과 약속을 잡을 때도 미리 뇽과의 스케줄 유무를 확인하고 정하곤 했다. 나는 갑작스런 만남을 좋아하지 않아서 누구와 약속을 잡든 항상 일주일 전에는 얘기해야 응하는데, 뇽과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다른 사람들과 약속을 잡을 때 제약이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 달 전에 얘기해”가 입에 붙었다.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매 주말마다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물어보면 죄다 뇽을 만나는 일이다. 지난주에 봤으면서 또 만나냐고 묻는다면 네, 또 만납니다. 보통 연인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만나는 횟수가 처음보다 줄어든다는데, 우리는 정말이지 별일 없이 그렇게 자주 만났다. 그리고 이제는 같이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함께 보낸다.

별일 없어도 좋지만 별일 있으면 더 좋지


같이 살기 전, 주말에 가장 많이 한 일은 대부분 영화를 보고 카페 탐방을 가거나 뇽의 집에서 치킨 먹으면서 <무한도전>을 보는 것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뇽은 조조 영화 약속을 잡으면 상영 시간이 임박해서 아슬아슬하게 나타났고, 본인 집에서 만나는 날에는 꿀잠을 자느라 문도 안 열어줬다. 염치 불고하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 내가 이불 위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 뇽은 그제야 심장을 쓸어내리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영화를 보거나 <무도>를 보는 시간 외에는 뭔가를 우적우적 먹으면서 떠드는 일이 대부분이다. 화제는 오늘 같이 봤던 영화나 방송 이야기, 둘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주변인 이야기, 최애 연예인 이야기, 여행 계획 등인데 지난 주와 이번 주의 화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떨 땐 아예 대화조차 하지 않는, 한 명은 드러누워 자고 한 명은 만화책을 보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다. 그렇게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고도 우리는 단지 시간을 공유하는 게 목적인 사람들처럼 그 다음 주에 또 만났다. 밖에서 만날 건지, 집에서 만날 건지를 물어볼지언정 이번 주에 우리 만나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지각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 아마 뇽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약속을 잡았는데 이렇게 자주 기다리게 했으면 진작 인연이 끊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20대 때의 뇽은 미리 약속하지 않은 날에 갑자기 시간이 생겼다며 만나자고 연락해서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이런 것만 봐도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인데, 나는 그 순간에 혼자 툴툴대기는 해도 이상하게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뇽은 약속은 마음대로 잡더라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최대한 나를 배려해서 불편하게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관심 없는 분야에 굳이 발을 들이게 만드는 비상한 영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한도전>이 <무리한 도전>일 때부터 봤던 뇽은 토크쇼가 아닌 예능은 잘 보지 않았던 나에게 강제 시청을 하게 하더니, 결국 <하하 vs 홍철> 특집을 현장 관람할 정도의 덕후로 성장시켰다. SF영화는 지루해서 끝까지 본 기억이 없는 나에게 영화 <스타트렉>시리즈를 영업한 것도 뇽이다. 녀석은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본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에서 내가 덕질할 만한 요소가 있는지 미리 살펴본 다음 결정적인 타이밍에 눈앞에 들이대서 빠져들게끔 만든다. 덕분에 나는 메가박스 무비 올나잇 첫 영화를 스타트렉으로 끊었고, 롯데월드몰 1층 레드카펫 펜스에 함께 낑긴 채로 스타트렉 멤버 3인방을 맞이하였으며, 뉴욕 여행 일정 중 하루를 스타트렉 체험전으로 채워 넣었다.


<마블>은 또 어떠한가. <어벤져스> 1탄 개봉 당시 나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으며, 겨우 뇽의 손에 이끌려 보러 갔으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뇽은 포기하지 않고 <어벤져스> 멤버들의 솔로 무비를 보여주며 내가 걸려들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서 발이 묶인 나는 <어벤져스 - 엔드게임>까지 함께 했으며, 워싱턴 링컨 기념관 앞에서 ‘on your left’ 인증샷까지 찍었다.

on your left! 내 옆을 스쳐 갈 캡틴 아메리카의 등장을 기다리며.

이렇게 취향 개조의 성공 사례가 있는가 하면 실패 사례도 당연히 있다. 이를테면 우주 다큐멘터리 같은 것. <스타트렉>과 <어벤져스>는 나에게 우주 아이돌을 파게 할지언정 우주 자체를 덕질하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뇽은 본인이 재미로 틀어놓은 우주 다큐멘터리를 자장가 삼아 내가 숙면할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공유하면서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설령 동상이몽이더라도 함께 있는 시간이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같이 사는 지금은 함께 TV나 유튜브 영상을 볼 때도 있지만, 뇽은 휴대폰 게임을 하고 나는 커뮤니티 게시글을 훑으며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주말 아침에 뇽이 자는 동안 내가 먼저 일어나서 사과를 와작와작 씹어먹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이렇듯 인간관계에 있어 안정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 나머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보다는 둘이서 질리도록 붙어있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매일 붙어있다 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정도를 넘어, 웃음 코드와 말투까지 닮아간다. 예능을 보면서 혼잣말을 내뱉거나, 지인과 셋이 만나서 이야기할 때 토씨 하나, 억양 하나 틀리지 않고 동시에 말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이렇게 똑같이 말할 거면 한 명 만 얘기해”, “블루투스 좀 꺼”라며 서로 타박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둘이서만 좋다고 낄낄거리는 일도 많다.


사촌 동생이 놀러 왔을 때의 일이었다. 지들이 먼저 놀러 오라고 초대해놓고는 막상 집을 치울 생각을 하니 너무도 귀찮아서 늑장 부리다가, 손님이 도착하기 직전에 부랴부랴 청소를 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그나마 청소 막바지에 동생이 도착했고, 우리는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 이만하면 집이 깨끗하지 않냐며 동생이 입을 떼기도 전에 자랑을 그렇게 해댔다. 그리고는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음료를 준비하겠다고 찬장에서 컵을 꺼내는데, 가스레인지 후드에 시뻘건 고추장이 이따만하게 튀어 있는 게 보였다.

대체 이건 언제 어떻게 묻힌건지, 이 꼴을 해놓고 뭘 그렇게 대단하게 산다고 손님 앞에서 우쭐댔던지 어이가 없었던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화장실에서 막 뛰어나온 동생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맨날 붙어 있는데 그렇게 웃을 일이 있어?”라고 물었고, 우리는 또 동시에 웃음을 멈추고 “그럼 붙어 있으면 웃을 일이 없어?”라고 반문했다. 다른 사람들은 가끔씩 봐야 더 즐거운가? 흐음, 직장 상사라면 붙어 있을수록 웃을 일이 줄어들긴 하겠다만. 우리는 맨날 붙어있는데 질리지도 않고, 웃을 일도 더 많다. 그래서 같이 사는 게 틀림없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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