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는 결혼 안 한대? 독신주의자야? 1

<뇽> 독신이라기엔 혼자 살아본 적이 없는데...

by 뇽알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내가 꿈꾸는 먼 미래의 내 모습이 있었다. 그런 것도 일정 부분 주입식 교육의 탓이었는지 - 굳이 탓을 돌려본다 - 내 나이대 여학생들은 대부분 미래에 대해 비슷한 상상도를 그리고 있었는데, 세부사항은 대략 이렇다. 20대에 대학생활 중 CC가 된다. 25살쯤이면 약혼자나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 26살쯤 결혼을 하고 아이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키우면서 30대엔 하고 싶은 일을 다 이루었을 것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상상. 그 상상대로 라면 지금 내 나이는 어쩌면 여생을 보내고 있는 셈이 아닐까. 현실은 근처도 못 갔지만.




22살 여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선’ 자리가 있다며 생각이 있느냐며 내 의사를 물었던 적이 있다. '소개팅'도 아니고 무려 '선'. 그 찰나의 순간에 나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아들을 둔 아버지의 직장동료와 서로의 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소개를 시키자며 진행했을 것이 순식간에 그려져 난 아버지에게 최대한 대들 수 있을 만큼 대들었고 - 소리치고, 깽판 치고 - 그것에 크게 데인 아버지는 다시는 나에게 선이든 소개팅이든 건수를 물어오지 않았다. 20살이 넘었는데 남자 친구가 있던 없던 그것까지 간섭을 받는다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남자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어서 학창 시절 좋아하던 남학생도 있었고, 지금도 분명 이상형이라고 꼽는 남자 배우가 있지만, 매년 결혼 생각은 점점 사라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각도 많아지고, 자기주장도 확실해지고, 무엇보다 사회적 기준이 생기니 결혼을 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난 정확히 20대 초반쯤 '나 하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가정을 책임지라니!' 하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은 미루고 또 미루고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다 여의치 않으면 그냥 안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낸 것이다. 현실 감각이 지금보다 떨어지던 나이였음에도 결혼과 가정은 먼 이야기였다.

학창 시절 학년이 바뀌면 교우관계를 새롭게 다져야 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사회생활을 위해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나마도 이직이 잦았던 나는 거의 매년 주변 사람들이 바뀌는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을 치러야 했는데 거기에 미래를 함께할 배우자를 새로 사귀라고?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처진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하는가. 그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지.... 새롭게 알아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저 직장동료와 간단한 교우 관계를 맺으면서도 힘들어하는 내가 인생의 동반자가 될 법한 사람을 새롭게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마어마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나의 신념들을 나열하며 결혼할 생각이 없다, 혹은 결혼을 안 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 그 뒤엔 자연스럽게 “독신주의자냐?”라는 질문이 따라 나온다. 그런데 '독신(獨身) 주의'라면 혼자 살아야 하지 않나? 애석하게도 난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뒤늦게 다시 대학을 다닐 때도 기숙사를 공유하는 룸메이트가 있었고, 몇 달간 뉴욕에서 지낼 때에도 비싼 방값을 셰어 하는 룸메이트가 있었다. 심지어 하우스메이트까지 당시 한 집에 5명이 함께 거주했다. 게다가 지금과 같이 독립하기 전엔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니 아무리 계산을 때려보아도 혼자 살았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는 게 아닌가! 사실, 이 글을 쓰다가 깨닫게 된 내용이라 조금 놀랐는데, 그동안 나는 나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드문 드문 존재했던 혼자 산 경험을 토대로 나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이런 사람에게 '독신주의자'라는 타이틀이 가당키나 할까. 완전히 혼자 산 경험이 나에겐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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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에 많은 친구들이 결혼을 했다. 대다수는 지금 육아 중에 있고, 그중 절반 이상은 연락이 끊겼다. 물론 그것은 나의 의지도 그들의 의지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을 뿐. 기혼자가 되어보지 못해 그들의 사정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시어머니가 부른다'며 사라지는 친구들과 '남편'에게 뭔가를 해줘야 한다고 사라지는 친구들, 아이가 갑자기 아파 모습도 보이지 않는 친구들을 보며 그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역시 바뀌어버린 자신의 생활에 적응해서 잘 사는데 너무 자유롭게 '아무 때나' 스케줄을 만들어내는 미혼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으리라.

아직도 연락이 되거나 종종 만난 기혼자 친구들은 가끔 나에게 “혼자 멋있게 산다니 부럽다.”라고 말한다. 혼자 사는 것도, 멋있게 사는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부러움을 받고 있으니 괜히 우쭐해진 적도 있는데, 30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뉴욕으로 갔을 때가 가장 심했다. 이미 결혼한 친구들은 남편 혹은 자녀 때문에 하고 싶은 선택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그 많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깨닫게 된 것이다.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 수 있고, 하다못해 이직을 하고 싶으면 그냥 이직을 하면 되는 싱글의 삶. 인생의 가치를 남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를 보며 '역시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꽤 많은 기혼자 친구들은 대화의 말미에 “근데 결혼 안 해? 같이 사는 그 친구는 결혼 안 한대?”하는 소리를 하지만 말이다. 야, 네가 여태까지 나 이렇게 사는 거 부럽다며.


결혼해보지 않아 결혼한 삶이 어떤 장점이 있는지, 혹은 어떤 단점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친구랑 살면서 생기는 단점을 하나 꼽아보자면 아직도 나의 법적 보호자는 같이 사는 친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살고 계신 부모님이라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막 자정을 넘기던 시간, 나는 갑작스러운 위경련으로 구급차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끙끙대며 갖은 소화제와 진경제를 들이부어도 위경련이 해결되지 않아, 막 잠들려던 알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구급차를 부르더니 나를 실어 올리고 자신도 보호자로 함께 동행했다.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통 속에 헤맸고, 내 발치에 앉아있었던 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차가워지는 내 손이나 발을 쓸어주고 마실 물을 가져다주는 등 내 옆을 지키며 간호를 해줬다. 응급실에서 내가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 동안 내 신상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알은 병원 수속 처리와 보호자 등록을 했고 이후 새벽 5시쯤 진료비 영수증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지도 않은 사실을 알게 됐다. 보호자는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나의 모든 병시중을 들었던 내 친구 알이 아니었다 - 알은 우리 어머니의 성함 및 연락처를 알고 있어서 보호자 등록을 할 수 있었다 -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내 이 꼴 저 꼴을 보며 수발을 들어준 내 인생의 동반자라고 할법한 존재가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니. 친구랑 살면서 느낀 유일한 단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마도 이와 반대로 결혼의 가장 큰 장점은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법적 보호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옆에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나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나는 단순히 '부모님이 걱정할 것이 염려되어' 연락을 안 하는 쪽이었지만 만약 부모님과 절연을 했거나, 지방에 계시거나 기타 다른 사유를 가진 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때문에 나는 생활 동반자법을 들고 나오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게 누가 됐든 한 표를 선사하기로 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작은 다툼을 쌓아놓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질 '남'이 아니다.


20180312_022116.jpg 정신이 들자마자 사진부터 찍어달라고 한 나


그럼 친구랑 사는 것의 장점은 무엇일까? 진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단, 우리 집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모든 감정에 대한 공감도 끊이지 않는다. 웃을 일이 있으면 같이 웃고, 울고 싶은 일이 있으면 같이 운다. 재밌는 것이 있으면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결혼해도 다를 거 없는데요?’라고 묻는다면, 왜 아니겠는가. 어쩌면 비혼과 기혼의 장단점은 위에 언급한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한다면 모든 장점을 공유하는 게 아닐까 싶다.



<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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