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뇽> 맨날 붙어 있으니까 재밌는거 아니고?
같이 살기 전 부터 오랜 친구들 - 특히 고등학교 동창들 - 에게 심심치 않게 들었던 질문인데, 같이 살면서 그 질문의 빈도수가 박차를 가했다. 근데... 같이 있는게 질릴일이었나?
현재 같이 사는 우리는 직장생활을 빼고 거의 모든 생활을 공유한다. 같은 자리에서 자고, 같은 층간소음을 겪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사전설명 없이 바로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 할 수 있고, 같은 화제에 분노하고, 하나의 주제로 토론이 가능하다. 같이 산다는 건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고 그만큼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생긴다는 뜻이다.
심지어 취향 개조까지도 이루어 지고 있는 중이다.
알은 SF영화나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원인으로 꼽는 것들은 주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유치하다' 등등인데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거의 반강제적으로 함께 하고 있으니 다른 의미로 관대한 오타쿠 정도로 볼 수도 있겠다. 내 기준 SF영화의 정점에 있는 <스타트렉> 시리즈를 나로 인해 보고 있고, 유치해서 보기 싫다던 히어로 무비 <마블> 시리즈를 역시 나로 인해 의무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싫다는 애를 억지로 끌고가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탓에 기본적인 취향을 알고 있는 나는 알에게 '좋아할만한' 컨텐츠를 디밀어 <스타트렉>을 영업했는데, 영화적 스토리와는 별 상관없이 두 주인공의 관계성을 엮어주니 그 뒤는 마치 굴비두름 처럼 엮여서 따라오게 되었다. 그 이후 알은 나보다 더 열심히 <스타트렉>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으며 나중엔 나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들고 와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이후 함께 뉴욕 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때마침 그 곳에서 진행 중이었던 <스타트렉 체험전>에 가고 싶어 조심스럽게 예매 의사를 물어봤을 때 알은 오히려 뒤늦게 말하는 나를 책망하며, “너는 왜 그런 걸 지금 얘기하냐. 당장 예매해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SF라면 기함을 하던 그녀에게 <스타트렉>영업이 성공하다니!
<마블> 시리즈 역시 경과가 다르지 않다. 안일한 생각으로 처음 함께 <어벤져스>를 보러 갔을 당시에는 모든 캐릭터를 알고 있는 나와 달리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외계인은 또 뭐며, 저 사람이 왜 대장이냐는 등 부정적인 후기만 잔뜩 늘어놓아서 영업 실패의 쓰디쓴 맛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의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소나무 같은 취향을 알고 있는 나는 대번에 마블 캐릭터 인물 면면을 들어 영업하기 시작했고, 그중 한 명이 간택되자마자 그의 단독 시리즈를 보여주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덕분에 알은 현재 <마블> 시리즈 중 <캡틴 아메리카> 를 최고의 명작, 최고의 플롯이라며 극찬하기에 이르렀고, <마블>의 모든 히어로들의 캐릭터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전대물이라면 일단 저게 뭐냐는 소리부터 하던 알이 나와 함께 <마블>을 파고 있다는 점이 나로서는 ‘같이 있는 행복’을 실감하게 해준다. 어쩌면 ‘함께하는 덕후’로서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들으면 나 역시 알의 취향에 맞게 개조됐을 것 같은데 그건 또 그렇지가 않다. 알은 나와 달리 스케일이 작고 심심한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배우가 있어 그 배우의 작품은 무조건 보러가는데, 나는 두어 번 따라가거나 VOD를 같이 보긴 했지만 알의 영업이 실질적으로 나에게 먹힌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몇 년 전 알의 개인 취향에 딱 들어맞을 듯한 영화가 개봉했는데, 그것이 내 취향은 아닐 거라며 알 혼자 집 근처 영화관에 가서 조조를 보고 온 적이 있었다. - 알은 조조가 사람이 적고 싸다면서 좋아하지만 나는 감히 조조에 도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 그 때 알은 같이 가기는커녕 그 시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자고 있었던 나에게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돌아와서는 “야, 나 혼자 가서 다행이야, 노잼노잼”이라며, 본인 기준에서 망한 영화를 나와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
이렇듯 취향과 코드가 대척점의 양 끝에 있는 우리지만, 가끔 신기할 정도로 서로의 취향에 들어맞는 인물들이 하나의 그룹에 속해있어 함께 덕질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도 그 안에서 좋아하는 멤버가 다르며, 같은 영화를 봐도 각자 다른 배우에 영업된 채로 극장을 나온다. 덕분에 함께 좋아하되 괜한 경쟁심을 느낄 일이 없다. 무엇보다 다행인 건 둘 다 머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머글: 덕후가 아닌 평범한 사람을 이르는 말) 덕질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뿐더러, 집안에서 덕후들끼리나 통할 음지의 대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편하고 좋다.
사실 이건 알의 덕후 친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의 덕질을 서포트해 주는 편인데, 알이 최애 배우 관련 행사를 갈 때면 내가 따라가서 알 대신 사진을 찍는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덕질을 할 때면 알이 같이 나와서 줄을 서주거나, 혹은 아침형 인간이 되지 못하는 나 대신 일찍 가서 번호표를 받고 인수인계해준다. 번호표 인수인계 후 알은 대기줄을 빠져나와 서점에 가거나 먼발치에서 내 배우를 함께 보는 편이다. 어쩌다가 같이 보게 되는 날이면 분명 내가 좋아서 오게 된 것인데 알이 영업 돼서 그 배우를 같이 좋아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난 알의 배우에게 영업이 된 적은 또 없었다. 아, 이기적으로 확고한 취향.
취향이 다르다보니 즐기는 것이 다르고 와중에 또 대주제를 함께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는 매일 새롭고, 또 매일 즐겁다. 오히려 하루 안보이면 서운해 할만큼.
<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