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내가 독립해서 뇽과 같이 사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셨다. 두 분은 그 옛날 대입 원서를 쓸 때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 숱한 이직에 이르기까지 나의 선택이 경솔할지라도 반대하신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연예인 보러간다고 사인회장이나 레드카펫으로 달려가도 현관문 앞에서 가로막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지극히 안정지향형 인간인지라, 뭐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부모님이 걱정하시기에 앞서 몸을 사리는 편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내 최애가 보고 싶기로서니 학교나 사무실 안에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오지는 않는 것이다. 어쩌면 몰래 나왔는데 들키지 않고 떡밥도 얻는 찬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혹여라도 발각되어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일엔 선뜻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고로 큰 손해도, 큰 이득도 없는 편이다. 내버려 둬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어쩌다가 잔소리를 할라치면 질색을 하고 귀를 닫아버리기 때문에 부모님의 잔소리나 간섭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에 이르면서부터는 모든 부모님들이 한번은 짚고 넘어가는 ‘결혼’이라는 통과의례에 대해 우리 부모님도 더 이상 무심함을 가장할 수 없었다. 대중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굴을 파는 내 성격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싶게, 각자 속한 커뮤니티에서 핵인싸인 부모님은 주변에 ‘결혼하지 않았는데 유능하고 인품과 경제력을 갖춘’ 자녀 혹은 친척을 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유능하지도, 인품과 재력을 갖추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결혼 생각도 없는 자녀인데 엄마는 잊을 만하면 선 자리를 물어와서 나에게 싫은 소리를 듣곤 했다. “결혼도, 연애도 생각 없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서 남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라고 정직하게 말해봤으나 같은 일이 두 번 더 반복되면서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여태 결혼을 안 하고 있다가 날 왜 만나겠냐. 본인 레벨에 맞는 사람을 찾겠지”라고 가시를 담아 대꾸해버렸다. 그래도 엄마 눈에는 내 자식이 최고일 텐데 너무했나, 싶지만 이후로는 같은 제안을 하시지 않는 것을 봐선 이게 정답이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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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결혼 문제는 흐지부지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결혼만 안 한다고 내 인생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모님께 얹혀살고 있다는 압박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든지 아니면 함께 살면서 효도를 하면 되는 것을, 인품과 재력이 부족한 나는 독립과 효도 대신 히스테리를 부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인생에서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은 떨어져 있어 봐야 깨닫는 법.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는 대신 하루하루 짜증을 적립하며 보낸 불효자가 바로 나다. 엄마가 매일 아침밥도 차려주시고 출근한다고 배웅도 해주시고, 퇴근하고 와서 방바닥에 붙어있으면 세수하고 자라고 친절하게 깨워주시기까지 하는데 대체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짜증 낼 일이 뭐가 그렇게 있었던가, 싶지만 그때의 나는 요만한 일에도 이따만하게 짜증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예민 보스였다. 아마도 그 ‘얹혀살고 있다’라는 생각이 자격지심으로 발동해서 그랬지 싶다. 나를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못 미더워서 참견하는 것으로 들렸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채로 퇴근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타이밍에 말을 걸면 밖에서 터졌어야 할 화가 엉뚱한 데서 분출해버린 것이다.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쓰레기가 눈에 띄고 싱크대가 지저분하면 얼른 치우는데, 그때는 다른 사람이 어지른 걸 내가 치운다는 생각에 억울했던지 잘 치우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배려를 익히는 대신 타성에 젖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이 뾰족한 심성에 기름을 붓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면, 우리 집은 명절·제사 및 기타 사유로 친척들의 방문이 잦았고 부모님의 친구분들도 종종 놀러 오시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휴일에 어질러진 방에서 마음 편히 누워있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남의 눈에 ‘결혼도 안 하고 아직까지 얹혀사는 자식’으로 보일 거라는 자격지심이 장작이 되어 불타올랐다.
결국 우리 집인데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을 안고, 휴일마다 역마살이 낀 사람처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패턴이 형성되었다. 일찌감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켜놓고 졸고 있거나, 서점에 쭈그려 앉아 다리가 저리도록 책을 읽거나, 부모님이 외출하신 뇽의 집에 놀러 가서 방바닥에 누룽지처럼 붙어있는 게 좋았다. 지인들은 휴일인데 일찍부터 싸돌아다니냐며, 내가 매우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사람인 양 오해했지만 실상은 나를 좀 내버려 두라며 귀찮음을 무릅쓰고 도망 다닌 셈이다. 그나마 회사를 다닐 때는 주말에만 부지런을 떨면 되었으나, 퇴사하고 나면 백수 콤플렉스까지 추가되어 더더욱 집에 붙어있지 못하고 밤이 늦어서야 겨우 들어와 이력서를 넣고 잤다. 부모님은 나름대로 배려하고 있는데 집을 불편해하는 나에게 섭섭함을 느끼셨고, 나는 능력이 되지 않아 부모님 집에 의탁한 채로 성질이나 부리는 못난 자신에게 자괴감이 드는 씁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찾아온 독립의 찬스에 대해 부모님이 반대 할 이유는 없었다. 가급적이면 손 없는 날 이사해라, 가까운 사이 일수록 부딪칠 일이 많으니 신경 써라, 밥 잘 챙겨 먹고 다녀야 된다는 당부는 하실망정 “결혼은 안 하면서 친구랑 산다니 안돼!”라는 말씀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매 주말을 함께 하고 모든 국내·해외여행을 같이 갔던 뇽과 함께 산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평소 내가 틈틈이 엄마에게 얘기했던 ‘나에게 없는’ 뇽의 장점 - ①길눈이 밝고 지도를 잘 읽어서 어디 가서 헤매는 일이 없다. ②매사에 대범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다. ③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아 재주가 많다. 심지어 부동산 정보에도 관심이 있다. ④숫자에 밝고 계산을 꼼꼼히 한다 - 또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는 데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나 혼자 나가서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안심이 된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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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날 아침, 아버지는 용달 아저씨가 두 분이나 오셨음에도 굳이 내 짐을 손수 들어서 내주셨다. 부모님 없이 처음으로 혼자 진행하는 이사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배웅해주신 아버지의 표정이 시원섭섭했는지, 쓸쓸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에 출근하시느라 내 짐이 나가는 현장을 못 본 엄마에게도 이사를 마치고 겨우 카카오톡이나 보냈을 뿐, 자식이 훌쩍 떠난 빈방에 들어와 보셨을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잠깐 카카오톡 대화창 스크롤을 올렸다가, [집이 허전하네. 버스 내리는데 딸이 기다리고 있는 거 같더라고. 그동안 마중 나오느라고 수고했다]라는 문자를 발견하고 잠시 먹먹해졌다. 내가 얹혀산다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매일을 좌절과 짜증으로 보내는 동안에도 부모님은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간직해주셨구나, 라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다니. 나는 정말 예나 지금이나 철이 없다.
돌이킬수록 소중한, 엄마와 나눈 한잔의 추억
나이를 아무리 먹은들 부모님의 마음을 감히 헤아리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가끔 찾아뵐 때라도 잘 해드려야겠다는 다짐을 이 기회에 새로 고침 해본다. 독립한 이후 2~3주에 한번 저녁 식사나 함께 할 겸 부모님을 뵈러 가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혹은 ‘집 청소를 대대적으로 해야 해서’ 등의 사유로 종종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는 게으른 딸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항상 서운한 내색 없이 신경 쓰지 말고 쉬라고 말씀해주신다. 쌀국수 한 그릇에 차 한잔하고 나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부모님과의 시간. 좋은 말들로 채울 수 있게 항상 신경 써야겠다. 나중에 다시 카톡을 읽고 펑펑 울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