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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Aug 26. 2021

내 아이에게서 아빠를 느끼다

  여섯 살 로운이가 수술을 받았다. 위험은 적은 편이지만 마취에서 깬 후 회복하기까지의 통증이 출산에 버금갈 정도인 수술이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로운이를 의사와 간호사들이 수시로 살폈다. 그들 모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잘 참는 아이는 처음 봤다면서. 이 수술을 받은 환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잠시도 쉬지 않고 악을 쓰며 고통을 호소하는 게 일반적인데, 로운이는 눈을 감은 채 끙끙거리기만 했다. 이따금 너무 아프다며 다급하게 “엄마! 엄마!”라고 한 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을 뿐이다. 

  로운이는 평소에도 어딘가에 부딪혀도, 다쳐서 상처가 생겨도 덤덤한 편이었다. 내가 녀석에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고 알려줄 정도였다. 누구를 닮아 이리도 참을성이 대단한 건지 궁금했는데 드디어 알아냈다. 의료진이 놀랄 정도의 참을성을 보였던 또 한 사람이 가족 중에 있었다.   

       

  나의 아빠가 그랬다. 말기암 환자였던 아빠의 앙상한 손등에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만큼 두꺼운 주삿바늘이 꽂힌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대바늘이 깊숙이 밀고 들어가자 눈을 질끔 감았던 아빠. 지혈을 마친 의사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비명을 지르는 환자가 대부분인데, 아빠처럼 희미한 탄식만 입가에서 새어 나온 경우는 처음이라고.

  나의 아이에게서 아빠를 느끼게 될 줄이야! 9년 전, 갑작스레 영원한 이별을 한 후 언제나 그리운 분을. 병원에서 로운이와 지내는 동안 녀석이 친정 아빠와 닮은 점을 수시로 발견했다. 나는 그때마다 말해주었다.

  “우리 로운이가 할아버지를 닮았네. 할아버지도 참기 대왕이셨거든.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셨다고 했잖아. 하지만 통증을 엄청나게 잘 참으셔서 의사랑 간호사들이 놀랐었단다.”     

 

  “우리 로운이는 이렇게 손가락이 어마어마하게 길고 가늘지? 이것도 할아버지 닮았네. 엄마는 할아버지가 어서 힘내고 건강해지시길 바라면서 손을 꼭 잡고 자주 쓰다듬어드렸거든. 그때마다 손이 아주 곱다고 생각했었지. 우리 로운이 손도 그래. 참으로 고운 손이야.”     


  “어머나! 누웠을 때 이렇게 무릎 세우고 한쪽 다리를 꼬는 것까지 할아버지랑 똑같네! 그런데, 건강을 위해서 다리 꼬지 말자, 귀염둥아.”     


  “할아버지는 엄청난 효자였거든. 우리 로운이가 그것도 닮았네. 툭하면 엄마한테 선물이라면서 그림도 그려 주고,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어서 줬잖아. 그리고, 엄마 기분이 안 좋은 거 같으면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물어봐 주고 걱정해주잖아. 그건 효자라서 그런 거야.” 

  “로운이는 짜증을 잘 안 내고 사람을 배려하는 아이잖아. 이것도 할아버지 닮아서 그래. 어떤 환자들은 너무 아프면 가족들한테 막 짜증을 내고 화를 내거든.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셨을 때 옆에 있던 환자가 그랬었어. 그래서 그 가족들이 모두 힘들어했었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화내지 않으셨어. 할아버지도 걷기 운동을 많이 해야 했지만 고관절이라는 뼈를 다치셔서 많이 걷는 게 힘드셨어. 그때 힘들다고 짜증 낸 것이 아니라 '다리가 너무 아프다. 부탁이다. 그만 걷자.'라고 차분하게 말씀하셨지. 우리 로운이도 할아버지를 닮아서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네. 엄마가 조금만 더 걷자고 하면 많이 아픈데도 어떻게든 엄마 말 존중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로운이가 친정 아빠를 닮은 점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 좋은 신기함에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녀석이 더욱 사랑스럽게 보였다. 로운이도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한 번도 뵌 적은 없는 분이지만 녀석의 마음속 할아버지는 엄마가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훌륭한 분으로 자리 잡혀 있다. 내가 아빠와의 마지막 76일을 기록한 책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에 나오는 사례를 평소에 종종 얘기해준 덕분이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나의 아빠는 참 좋은 사람, 참 좋은 아빠임에 분명했다. 헌신과 인내로 채운 삶이었다. 자신보다 다른 이를 더 우선시했다. 타인의 관점에서는 훌륭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아빠는 자신의 행복을 우선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점만큼은 로운이가 닮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친정 아빠의 심성을 많이 닮은 아이인데…… 과연 녀석은 어떤 삶의 주인공이 될까?

  내 손을 잡고 조심스레 한 걸음씩 떼며 걷기 운동을 하는 녀석에게 말했다.

  “로운아, 우리 로운이는 엄마가 행복하게 해 줄게.”

  나의 꼬마 천사는 심호흡으로 통증을 진정시키더니 속삭이듯 답했다.

  “응.”          


  덧. 빠른 회복을 위해 반드시 많이 걸어야만 했던 로운이는 아픔을 참아가며 내 손을 잡고 수시로 걸었다. 덕분에 통증이 상당히 줄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침대에 누울 때, 누웠다가 일어날 때, 앉을 때 등 자세를 바꿀 때를 빼고는 그다지 아파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심호흡으로 금세 진정시켰다. 마침내 진통제가 필요 없게 되었고, 수술 후 이틀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따르면 매우 이례적인 조기 퇴원이었다. 아무래도 아빠가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도움을 주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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