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건축가 Hudec와 상하이에 대한 이야기
슬로바키아태생의 한 명의 헝가리 건축가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건축가인 아버지를 따라서 9세의 나이에도 공사현장에서 아버지 일을 도왔고, 일찍 건축기술을 익힌 탓에 목공, 미장, 석공등의 건축기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후 건축을 천직으로 알고 좋은 건축학교를 나와 왕립 건축가 협회 회원으로도 선출되었지만, 격동기의 시대에 밀려 1918년 25세의 나이에 상하이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혈혈단신 상하이엔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는 당시 미국 소유의 건설회사인 KLEE & Co. 에서 설계조수로 일을 시작하였고 약 7여 년이 지난 후 자신의 설계사무실을 시작하게 되죠.
상하이에 살면서......
Hudec를 모를 수는 있지만,
Hudec의 건물은 모를 수 없다.
상하이의 최고의 전성기를 꼽으라면 아마도 1920년대와 1930년대를 이야기하는 게 맞을 듯싶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정세가 안정되어 가는 시점이었고, 20세기초 다양한 예술, 문화, 과학, 기술, 의학등등에서 새로운 혁명들이 일어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조계(租界:concessions in China)라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상하이는 잠시나마 혼란에서 벗어나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죠.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으로 시작된 상하이 조계의 역사는 1842년에 시작됩니다. 영국의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가 상하이의 땅을 나눠갖고 치외법권지역으로 영향을 행사했죠. 이렇게 시작된 조게지역의 외국인의 유입은 초기 26명으로 시작되어 1942년에는 150,931명에 이르렀습니다. (상해연감참조)
영국은 승전국으로서 중국의 모든 것을 빼앗고자 하는 욕심이었고, 여러 열강들이 보기엔 점차 힘을 잃어가는 청나라가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죠. 상하이는 이런 이들의 좋은 교두보였습니다. 양쯔강과 함께 내륙으로 연결되는 2000km에 이르는 대운하가(수나라 때부터 조성) 상하이와 연결되기에 이 지역은 최고의 요충지였죠.
이미 1880년대에 도시가스, 수도, 전기, 상하수시설들이 완비된 도시 모습을 갖췄던 상하이 조계지역은 많은 외국인들과 함께 내륙의 인구도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열강들은 도시로 유입되는 이러한 인구를 수용하고자 영국의 산업혁명시대 겪었던 경험을 살려 도시 거주주택을 대량으로 찍어냈습니다.
상하이는 이렇게 청나라의 몰락과는 별개로 기회의 땅이 되었고, 실제로 많은 재벌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이 후데크Hudec가 상해로 유입되는 시대적 배경이 되는 거죠.
최근 상하이의 핫플레이스를 꼽으라면 여지없이 '安福路-武康路, anfulu-wukanglu'를 이야기합니다.
서울의 성수동을 이야기한다면, 상하이는 안푸루를 이야기하는 게 적정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중국 젊은 층의 SNS에는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하는 다양한 사진들이 올라옵니다. 이에 더불어 다양한 브랜드들이 거리에서 마케팅을 펼치기도 하면서 늘 새로운 볼거리들을 제공하죠.
여기에 랜드마크 격인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武康大厦wukang mansion'라고 불리는 건물로 1924년에 지어진 상하이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입니다.
이 건물이 유명해지면서 건물 주변엔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중국 젊은 세대들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보행거리로 유명한 초입에 있으며,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다양한 독특한 상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디자인공간들과 참신한 젊은 감성의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어 매우 인기가 있는 공간이죠.
예상하셨겠지만, 이 건물이 바로 후데크Hudec가 설계한 건물입니다.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해 있으며, 프랑스 북서부의 반도 노르망디 이름을 따서 'Normandie Apartments '라 불리었습니다. 대지가 삼각형 모양이라 약 30도 쐐기모양의 평면이 구성되어 있으며, 당시 주로 상류층 외국인이 거주했고, 이후 중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층엔 상가가 들어서있으며, 주거 부분엔 아직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현시세 제곱미터당 약 17.2만 위안, 약 3000만 원)
전에 관련 영상을 보면서 이 건물의 중요도와 인기 때문인지 거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더군요.
후데크Hudec는 이 외에도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약 50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그중 단일건물로 100여 개가 넘는 건물을 설계했고, 현재 상해에 남아 있는 건물만 30여 개가 넘는다고 하네요.
그중 28개 건물이 상하이시에서 지정하는 문화건물유적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한 명의 건축가가 도시에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외국인 건축가가 말이죠.
상하이시는 2013년도에 후데크Hudec가 살던 주택을 기념관으로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2015년 시작된 'Hudec건축유산문화달(12월)' 행사는 매년 진행되어 지금까지 후데크Hudec의 건축을 알리고 있습니다.
상하이엔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런 건물들 중에서 남길 가치를 따져서 보호건축물로 관리를 하고 있죠.
상하이시는 현재까지 5번의 공고를 통해서 총 1058개의 건물을 승인하고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비슷하지만 건물의 증개축은 절대불허하고, 광고나 주변 환경의 변화도 철저한 심의를 거쳐야 하는 거죠.
상하이 하면 떠오르는 와이탄의 근대 건축물들의 풍경은 이렇게 관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5번째인 쑨커주택은 쑨원의 장자인 쑨커가 살던 집입니다. 후데크Hudec가 직접 자신이 살기 위해 지었는데, 여러 이유로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고 쑨커가 손을 내밀어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지은 집이라서인지 디테일과 디자인이 매우 세련되고 아름답습니다. 외부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내부 스타일은 감탄을 자아내죠.
평소 개방 없이 특별 전시회가 있을 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위치한 '上生新所'라는 곳은 중국의 대표적 개발회사인 '완커万科'가 개발한 곳입니다. 미국조계지역의 '콜롬비아 서클 개발지역'으로 이곳에는 상해의 첫 일본 '츠타야 서점'이(항주에 이어 중국 2번째) 들어서 있고, 최근엔 한국 코오롱패션이 매장을 오픈했습니다.
이곳 역시 핫플레이스의 한 곳이 되었고, 많은 방문객들이 오가는 곳이죠.
옛 공간을 현대적 상업공간으로 재해석하고 개발하는 계획들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렇게 생기는 많은 장소에서 후데크 Hudec의 건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관람 포인트 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두 번째 이미지인 '沐恩堂목은당'이라는 교회건물입니다.
이곳은 상해의 중심이기도 한 난징루 근처에 위치한 교회 건물입니다. 이곳은 대한민국과도 연관이 있는 건물입니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국민대표회의를 진행했던 장소로 국내는 물론 중국 관내, 러시아, 미국, 만주 등 각자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독립운동계의 통일 방안과 임시정부의 조직개편 등을 논의했던 역사상 최대의 민족회의가 열렸던 곳입니다.
평소 닫혀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고, 이곳을 꽤 여러 번 지나갔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게 되니, 조금 부끄러움이 밀려오더군요. 초창기엔 상해에 대해 꽤 공부를 하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그냥 살아가다 보니 조금 무뎌진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다시 상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이 외에도 지면에서 언급 못하는 많은 후데크Hudec관련 이야기가 있는데요, 시간 내서 하나하나 더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후데크Hudec 건축은 상해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여러 매체에서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상하이에 살면서...... Hudec를 모를 수는 있지만, Hudec의 건물은 모를 수 없다."라는 말이 과장은 아닌 거 같죠?
1. 70여 년 전에 상하이를 떠난 유럽인이 오늘날 상하이의 도시 상징 중 하나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2. 그의 시대와 그의 관계는 무엇일까?
3. 오늘날 그와 우리의 관계는 무엇일까?
과거 역사를 살펴보다 보면 내용을 더 깊이 알수록 현실이 투영되기도 합니다.
상하이의 그 화려한 모습 뒤편으로는 중국 중앙정부의 부패와 혼란으로 고통받은 민중들이 있었고, 그 속에서 삶을 찾아 상하이 조계를 올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탐욕으로 이익을 챙기려던 서구열강들의 자본가들이 있었고요.
상하이에 가게 되면 꼭 들리는 곳이 있죠. 와이탄입니다.
와이탄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와이탄 쪽에서 푸동지역을 바라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푸동지역에서 와이탄을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청일전쟁으로 큰 빚을 지게 된 청나라에 열강들의 은행이 들어와 돈을 빌려주고 각종 잇권을 앗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와이탄 풍경을 만든 많은 초기 건물들이 금융권 회사들이었죠. 그런데 묘하게도 약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도 강건너에 있는 최첨단 빌딩들 대부분이 역시 금융회사들입니다.
그렇게 강하나를 두고 100년 상하이는 금융도시로 발전을 했었고, 경제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글쎄요... 치욕만의 역사일까요?
1920s, 1930s 시기의 상하이는 이런 암울한 배경과는 달리 경제, 문화, 패션, 예술이 꽃피던 지역이었습니다. 아시아 최초의...라는 수식이 붙는 많은 것들이 있죠. 최첨단 유행의 선봉의 역할이었고. 패션 아이콘이었던 샤넬 또한 상하이를 가보고 싶은 도시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대한독립을 외치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자유와 다양한 사상들이 오고 가고 논쟁하던 그런 문화가 있었습니다. 자유와 미래를 향한 사람들의 에너지가 있었던 곳이죠.
1947년 55세의 나이였던 후데크Hudec도 자신의 젊음을 함께했던 상하이를 떠납니다.
일본 침략으로 혼란했던 때를 넘어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다른 유럽인들과 함께 정들었던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겠죠. 그렇게 상하이는 20년이 넘는 시간을 닫혀있게 됩니다.
최근 중국의 정치적 상황과 코로나 등의 여파로 많은 외국기업들이 이미 떠났거나, 이전을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눈에 띄게 주변이 썰렁해짐을 느낍니다. 최근 중국경기의 장기침체가 외국인들이 이탈이 주요인일꺼라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데크Hudec를 연구하면서 여러 내용들이 오버랩 됩니다.
후데크Hudec를 통해서 옛 상하이의 낯선 유럽건축가로서 느꼈을 다양한 감정들이 조금은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당시 시대의 격변하는 사상과 디자인 방향에 어떻게 대응하려 했는지 그가 남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지금 MZ세대들에게 새로운 아이콘으로 느끼게 하는 모양입니다.
그가 우리가 건축에서 공부하는 '위대한 건축가'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외국인 신분으로 타지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공통점을 애써 찾으며 후데크Hudec를 조금 더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보다 그가 만든 과거공간과 현대의 트렌드공간이 어울려져,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되는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라고 보입니다.
어제 참여하는 작은 모임에서 후데크Hudec 관련 내용을 발표했었습니다.
다들 상하이에 20여 년 가까이 계셨던 분들인데, 저의 발표를 통해서 상하이가 새롭게 보인다는 말씀들을 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바로 투어 가이드가 되어버렸습니다.
투어 후 추가 내용을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