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여유가 없어도 즐길 수 있었던 취향
대학교 5학년, 내게 조금 특별했다. 4학년을 마치고 떠났던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돌아와 학교로 복학한 후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한국에서 마셨던 달달한 믹스커피, 카페모카카가 커피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에스프레소는 어른들의 쓴 음료일 뿐 내겐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내가 커피를 처음으로 제대로 맛본 건 호주에서였다. 친구 따라 무심코 들어갔던 작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처음으로 마셨다. 어떻게 마시는지, 방법도 전혀 몰랐지만 친구따라 마셨던 그 한 잔이 이토록 맛있다니! 진하면서도 고소하고, 쌉싸름하지만 깊은 여운이 남는 그 맛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음료였구나.'
물론 그때 호주 생활이 넉넉했던 건 아니었다. 워킹홀리데이 생활 속에서 커피를 자주 사 마실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맛을 알아버린 이상, 나는 때때로 커피에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한 모금씩 천천히 맛보며 행복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커피가 몹시 그리웠다. 그렇다고 매일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실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졸업 작품 준비에 취업 준비까지 겹쳐, 마음의 여유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번 알게 된 커피의 맛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나는 호주에서 마셨던 그 맛을 어떻게든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커피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커피에 관한 정보를 하나씩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한 책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이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리 주사기로도 에스프레소를 내릴 수 있다."
에스프레소는 당연히 비싼 기계로만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그 문장은 반가운 희망이었다. 바로 근처 의료기 상사에 가서 작은 유리 주사기를 구입했다. 몇 천 원짜리 주사기가 마치 특별한 커피 도구처럼 보였다. 동그랗게 자른 작은 종이 필터를 주사기 끝에 넣고 마트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분쇄 원두를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으며 주사기를 눌렀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커피를 기다리는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나는 온전히 커피에만 집중했다. 천천히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맛본 에스프레소의 향과 맛을 떠올렸다. 설계실 책상 위에 퍼지는 커피 향은 나를 잠시나마 호주의 그 작은 카페로 데려다주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이 짧은 순간만큼은 나만의 작은 사치이자 호사였다. 경제적 여유는 없었지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커피 한 잔은 오히려 값비싼 카페 커피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졸업 작품 때문에 밤새워 지친 어느 새벽에도 이 커피 한 잔이 나를 지탱해줬다. 설계실에서 창밖으로 어스름한 새벽 하늘을 보며 마시는 그 순간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아주 작고 소박한 습관이었지만 분명히 내 일상에 작은 리듬과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졸업 후 사회 초년생이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방구석 바리스타였다. 회사에서 늦게 퇴근해 지쳐 잠든 다음 날에도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화려한 장비나 값비싼 원두는 없었지만 물을 끓이고 커피를 천천히 내리는 시간 자체가 내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소중한 의식이었다. 특별한 장비도 없고, 비싼 원두도 아니었지만, 내 손으로 천천히 내리는 그 몇 분의 시간이 하루를 지켜주는 보호막 같았다. 회사에서는 언제나 빠르게 돌아가는 삶이었지만 방구석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만큼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고, 그때만큼은 완벽하게 느렸다.
지갑이 두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나는 매일 아침 깨달았다. 커피는 나에게 사소하지만 분명한 행복이었다. 비록 화려하지 않은 도구와 평범한 원두를 사용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비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작은 순간들에서 찾아온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호주에서 처음 마셨던 그 에스프레소 한 잔이 내게 알려준 것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호주에서의 짧은 커피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커피가 주는 이런 작은 행복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유리 주사기로 내린 에스프레소가 내게 가르쳐 준 건 행복은 돈과 상관없이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나는 방구석에서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린다. 이제는 유리 주사기를 쓰지는 않지만, 커피를 내리는 그 시간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커피 향이 퍼지는 순간, 여전히 나의 첫 에스프레소 한 잔을 떠올리곤 한다. 그 시절 처음 마셨던 에스프레소의 맛과 향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잘 살아낼 힘을 얻는다.
특별한 일상은 결코 화려한 데 있지 않았다. 그저 커피 한 잔에 온전히 집중하는 나만의 작은 시간 속에 있었다. 방구석 바리스타로 살아가는 이 작고 평범한 습관 덕분에 내 삶은 매일 조금씩 더 특별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