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읽고 한 모금 마시고.
술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해서 이 책을 쓰게 됐고, 이 책을 쓰게 돼서 말도 안 되게 기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세상에서, 다음 스탭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하고 막막할 때에 일단 다 모르겠고, ‘아무튼, 술!’이라는 명료한 답 하나라도 가지고 있어 다행이다. (P.14)
<아무튼, 술. 김혼비 지음>
읽으며 엄지 척! 김혼비 작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취향을 이야기하고 보여주며 글로 쓰다니.
읽으면 읽을수록 나 역시 술이 고프다. 참을 수 없다. 가장 좋아하는 술을 한 캔 따서 잔에 부어 한 모금 마셨다.
최고로 좋아하는 맛.
무슨 일이 있든, 어떤 상황이 되든 간에 이 한잔으로 모든 게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는 밤이다.
한 모금 마시고 한 장 넘기고. 반복하다 보니 나와 관련된 술과 사람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장 좋아하는 술, 아일랜드 흑맥주 기네스.
호주에서 접하게 된 술이다. 그때 친했던 K가 알려준 술.
나의 맥주 역사는 호주 가기 전과 후로 나뉜다. 호주 가기 전엔 친구들과 맥주 집 가서 한 잔 하는 게 다였다. 혹은 1차로 싼 안주와 소주를 마시며 취기를 돋우고 2차로 호프 집 가서 차가운 잔에 생맥주 가득 채워 짠! 하며 후루룩 마셨다. 그때는 맥주가 어떤 맛있지 정확히 모르고 그냥 시원한 맛에 먹었다. 사실 대학생 때는 소주가 최고였다. 반주로 마셔도 좋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한 잔 한잔, 투명한 잔에 찰랑이는 술이 맛있었다. 괜히 배부른 맥주는 왜 먹는지 잘 몰랐다. 갈증 나니까 시원하니까. 그래서 먹는가 보다 했다.
그랬었는데,
동네 펍에서 K가 알려준 기네스 맥주는 그야말로 천국의 맛이었다. (천국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냥 천국은 이럴 것 같다는 생각에 하는 말이다.) 시원한 건 당연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우며 탄산이 그다지 없는. 평소에 탄산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제격이다. 탄산음료를 좋아해도 이 맥주를 좋아할 것이지만, 평소에 탄산을 마시면 헛배 부른 기분을 굳이 느끼고 싶지 않다.
그 후로 기네스는 나의 최고의 술이 되어주었다. 어느 와인이 좋다더라, 이 와인 정말 비싼 거야, 이 술 정말 맛있지 않니?라고 얘기해도 (아직까지는) 기네스가 가장 좋다. 그리고 기네스는 캔으로, 병으로 바로 마시면 안 된다. 굳이 안 된다고 할 건 없지만, 내가 정한 규칙이라고 할까. 맥주 컵에 따라서 마시는 게 좋다. 그래야 기네스의 환상의 거품 쇼를 볼 수 있다. 잔에 따르면 올라왔던 거품이 촤르르, 갈색 액체에 흰 거품이 가라앉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는 한 모금 마신다. 후… 이 맛에 먹지.
1년 연애하고 3년 넘게 같이 살고 있는 내 짝꿍. 술 한잔 마시면 얼굴이 빨개진다. 술의 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취한 기분을 싫어한다.
그와 연애하기 전의 나는, 회사 사람들과 마치고 한 잔, 친구들과 동기들과 만나서 한 잔, 금요일 같이 다음날 출근 안 하는 날에는 집에서 영화 보며 한 잔. 밖에서 마셔도 좋고 집에서 혼술 해도 좋고. 이렇게 술을 좋아했다. 다만 안주가 너무 맛이 없거나 취해서 건 기분이 나쁘다. 불쾌하기까지도 한다.
감당할 수 있는 적당히 알딸딸한 정도가 좋다. 다음날 힘든 정도가 되면 한동안은 마시지 않고 스스로에게 술 금지령을 내렸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마시곤 했다. 이런 나와 연애하는 남편은 나에게 맞춘다고 함께 술을 마셔주었다. 그리고 그는 맥주 한 잔 이상을 할 수 없었다. 그땐 술친구가 생기면 좋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그랬던 나였는데 지금은 서로에게 최고의 술친구가 되고 있다.
남편은 새로운 맥주를 먹어보고 싶어 하고 몇 모금만 마시길 좋아한다. 또 이렇게 낮에 덥고 선선한 저녁 날에는 시원한 맥주를 먹고 싶어 하기에 우린 마주 보고 앉아 남편 몇 모금, 나머지는 내가 다 내 몫이 된다. 나도 취한 상태가 되는 걸 원하지 않기에, 딱 좋다.
같이 살다 보니 닮은 듯 비슷한 듯, 서로 잘 맞아가고 있다. 이 정도면 최고의 궁합 아닌가?
8월이 끝나가고 9월을 기다리는, 가을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이때가 정말 좋다. 술 마시기에 가장 좋은 날씨다. 낮에 더웠기에 갈증은 올라오고 저녁의 시원하고도 선선한 바람이 불기에 맥주 한 잔이면 ‘캬~’ 끝내주는 온도가 된다. 이때 마시는 술이 가장 맛있다. 밖에서 마시고는 집에 오는 길을 걷고 공원을 산책하면 최고의 날이 된다. 또 베란다 문 활짝 열어두고 집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마시기에도 더없이 좋다.
그랬었다.
작년 6월에 아기가 생겼다는 걸 알자마자 맥주와 안녕, 1년간의 이별을 고했다. 뱃속의 뚜이를 위해 잠시만 안녕했다. 그땐 입덧이 너무 심해서 가을날엔 술 한 잔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출산이 다가오니 왠지 그 알 싸름 한 한 잔이 그립기 시작했다.
‘그래 아기 낳고 한 잔만 하자. 거기에 초밥 한 다섯 점 먹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미련하게도 모유수유한다는 걸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기 낳는 것만큼 모유수유가 힘들다는 걸 왜 아무도 말 안 해줬을까? 몸이 힘들고 하니까 그 한잔이 더 그립잖아. 하지만 마실 수 없는 이 현실.
‘그래, 더 참자. 모유수유 끝나고 마셔. 그땐 원 없이 마셔.’
아기는 150일을 넘기며 모유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모유는 점점 나오지 않고 아기는 분유를 더 많이 찾게 되었다. 200일이 되면서 나에게 ‘맥주 한 잔’의 시간이 왔다. 게다가 점점 선선해지는 저녁 날씨까지. 술 마시기 좋은 날씨다.
아기가 잠들고 남편과 나는 먹고 싶었던 맥주를 사놓고 한 캔씩, 한 병씩 홀짝홀짝 마신다. 지금은 남편이 출장 갔기에, 아기를 재우고 몇 년 만에 혼 술을 하고 있다.
육퇴를 하고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혼술을 하고 있다니. 게다가 오늘 우리 아들은 효자 노릇을 잘하고 있다.
엄마 수고했다고, 술 마시라고 한 번도 깨지도 않고 쿨쿨쿨 잘 자고 있다.
‘우리 아기, 행복한 밤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