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이라도 뛰어본 사람이라면
약 10년 전 일이다. 20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 달리기에 빠져버렸다. 당시 지방에 살고 있었던 나는 좁디좁은 원룸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 좁은 방에 앉아 있으면 천장과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쫓기듯 집에서 나와 10분만 걸으면 천변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늘 누군가가 걷거나 달리고 있었다. 무작정 달리다 보니 짜부라졌던 내가 조금은 커지는 것 같았고, 숨통이 트였다. 다시 좁은 방으로 들어가도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간 신나게 달리다가 옆 도시에서 열리는 10킬로 마라톤 대회에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막상 마라톤 대회날은 새벽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에도 지지 않고’ 싶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대회 출전인데, 포기 따위는 없다. 막상 뛰기에는 너무 많은 비가 내렸지만 일단 집에서 출발했다. 우중 취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버스 타고 도착한 곳에서는 미리 준비한 우비를 덤덤히 나눠줄 뿐이었다.
뛰기도 전에 젖어서 질척거리는 운동화를 신고 어찌어찌 출발을 했다. 어떤 마음으로 달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1시간 전후로 걷고 뛰고 했던 것 같다. 비를 맞으면서 달렸던 그날은 내 인생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비에 사정없이 달라붙던 머리카락, 빗물에 젖어 앞이 보이지 않던 안경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내 몸인데 내 몸 같지 않은 비에 젖어 축 쳐진 내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던 기억도 잊어버렸다. 이제는 다시 몸을 움직일 때가 되었다.
갑자기 10년 전 했던 마라톤이 소환된 것은 누군가 내게 한 질문 때문이었다. 친선 경기가 끝나고 이틀 후 정식으로 입단하게 된 날, 신입인 내게 누군가 물었다.
전에 어떤 운동해보셨나요?
마치 '간' 보듯이 누군가 내게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 이후로 마라톤을 안 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마라톤’ 해봤다고 말하기엔 뭔가 어정쩡한 마음이었다. 등산이나 복싱, 발레는 한 번씩 나를 짧은 시간 거쳐간 운동이라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마라톤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사람들이 나에 대한 기대치가 막 올라갈 것 같아서였다. 상상이 되지 않는가? 마라톤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체력도 좋고 심폐지구력이 대단할 테니까. 나에 대해서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하다. 시작부터 회원들에게 실망감을 줄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고, 회원들은 금방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 오늘은 유니폼을 주문하고, 풋살화는 맘에 드는 걸로 따로 구매하면 된단다. 풋살화를 살 때는 절대 큰 것 사면 안되고 조금 작더라도 발에 꼭 맞는걸 신어야 부상 위험이 적다고. 정강이 보호대는 많으니 구입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설명을 듣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하고, 의욕이 더 생기기도 했다. 오랜만에 내 몸을 다시 한번 써보고 싶어졌다.
내 몸은 정말 괜찮은 걸까? 너무 오래 운동을 쉬어서 감이 아예 없는데, 일단 뛰면 기억이 나려나? 몸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10년 전 내가 마라톤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머리로는 기억하는데, 그 기억만으로 내가 충분히 오래 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조금 생긴 듯도 했다. 어렵게 시작한 풋살을 지속하려면 뭐든 필요했다.
그렇게 첫날 당황스러움 속에 인사를 마쳤고, 나는 풋살 클럽의 정식 회원이 되었다. 이제 뛰면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