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프랑스에 살던 화가 블라크*는 실종되었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경찰 조사에서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은 조용히 처리되었고 ,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사라졌다고 한다.
전사인 데니얼과 메이지*인 유리는 방금 동료들을 잃었다. 꽤 깊은 던전 속으로 들어온 터라 나가는 게 문제였다.
유리가 스테프(마법지팡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지금 시신을 가지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나가서 파티를 꾸린 뒤에 비숍(사제)을 데리고 와서 소생하도록 하자."
유리의 말에 데니얼을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의 리스크가 있으나 , 상급사제의 주문이면 높은 확률로 다시 살아나는 건 가능했다.
다행히 전사 직업인 데니얼이 살아 있어 , 어찌어찌 던전을 빠져나가는 건 무리가 없겠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지친 상태이다.
"안전한 곳에서 조금 쉬자."
유리의 말에 데니얼이 앞장서서 걸어간다.
던전을 이야기하기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제대로 알려면 우주 질서를 관장하는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이유로 던전이 만들어지기 했지만) 우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건 던전에서의 사건은 초월적 규칙으로 묶여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지."
유리는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데니얼이 잠깐 뒤를 돌아보긴 했으나 , 이내 묵묵히 걷는다.
데니얼이 어둠을 헤치면 걷는 동안, 유리는 생각에 잠겼다.
직업적으로 규격 외의 일을 겪다 보니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 버렸지만 , 사실 이것이 정상인가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을 피워내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 죽은 사람을 되살려 내는 게 맞는 일인가 하는 상념에 유리는 젖어들었다.
몇 주간 고생을 해서인지 , 굳이 지도를 꺼내보지 않아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여기 모퉁이를 돌면 커다란 회랑이 나올 것이다.
낡았지만 화려했을 긴 탁자와 의자들, 단출한 휘장과 장식에 벽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회화들이 걸려있었다.
이 회랑에는 몬스터들이 출몰하지 않았는데 , 이유는 벽에 걸려 있는 그림자체가 몬스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돼."
유리는 다짐을 하듯 되뇌었다.
현재 던전이 알려진 뒤, 이곳은 탐험하는 파티들의 공식적인 거점이 되었다.
그림자체는 공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림을 만질 시에는 그 그림 속세계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알려진 바로 그 그림 속 세계에서 나오는 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림 속 세계에서 주어지는 과제 (혹은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를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압도적인 힘으로 그림을 파괴하는 것이다. 검게 타버린 몇몇 그림들이 그 흔적들이다.
유리가 처음 그것(타버린 그림)을 보았을 때 혀를 내둘렀다. 마도적 법칙으로 구현한 하나의 세계를 날려버린다는 게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냥 퀘스트를 완수하는 게 효율적이었을 건데 저 정도면 나라 하나정도는 우습게 날려먹겠구나'
그렇게 태워진 그림이 한두 개가 아닌 걸 알았을 때 드는 생각은 하나이다. 세계는 정말 넓구나. 상상하지 못할 힘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저렇게나 있다니...
다니엘과 유리는 습관에 따라 회랑을 살펴본 뒤, 위협요소가 없다고 판단하여 회랑 중앙에서 문을 바라보고 쉬었다. 심층에 가까워질수록 모험가들이 많이 없다는 게 다행이지만 , 말 그대로 없다는 건 아니니 경계는 해야 했다.
'괴물은 던전에만 있는 건 아니니 , 그 마음속도 경계할지라.'
유명한 격언이다. 뭔가 곡해되어서 요즘은 모험가를 경계하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던전에서 몬스터보다 위험한 건 같은 모험가일 것이다.
유리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유리와 다니엘은 경험 많은 노련한 모험가이다. 누군가 갑자기 자신들의 소지품을 노리고 습격한다고 했을 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맡은 역할대로 움직일 것이다.
다니엘이 놈들을 막아 시간을 벌 때 유리 자신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여야 할지 , 주변에 은폐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 자신들의 전력으로 막을 수는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이곳의 좋은 점 중 하나가 그것이다. 자신들보다 월등한 무력을 가진 파티가 습격해 올 시 여차하면 그림으로 피신을 할 수가 있었다.
각각 그림 속 세계에 하나의 파티가 들어가 있으면 다른 파티는 들어올 수가 없다.
'단 그림을 잘 골라야겠지.'
유리는 생각을 한다. 모든 그림들의 파훼법이 있는 건 아니자만 , 대부분의 공략법이 알려져 있다. 하여 까다로운 몇몇 혹은 알려지지 않은 그림들만 빼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즐리의 아침이 좋을까.. 아니야 지금 조합이면 구울의 일생도 괜찮아.'
그렇다. 뭐 알다시피 그러하다. 이쯤 되면 유리와 데니엘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할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인생이 그렇듯 말이다.
어느 정도 공략이 완료된 던전은 생각보다 안정적이로 탐험을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시행착오를 겪은 것들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많은 모험가들이 생존하는 까닭에 어떤 타이밍에는 저층부에 몬스터들이 거의 없어지는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몬스터들이 채워지는 속도보다 해치우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이때의 문제점은 제대로 숙련되지 못한 모험가들이 가끔 심층부로 오는 것이다.
던전에는 던전만의 법칙이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피해를 주기도 한다.
유리와 데니엘이 방금 겪은 일이 그랬다.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초보모험가의 어그로로 인해 발생이 되었다.
"젠장 무슨 일이야!"
그 말이 없던 데니얼에게 외마디 비명 같은 질문이 나왔다.
유리는 생각했다. '진부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해.'
지금 회랑에는 좀비와 구울들이 가득했다. 어느새인가 데니엘과 유리는 회랑 구석까지 몰렸다. 데니얼은 정신저항을 준비한 채로 전위에 서서 방어를 했다. 저 멀리 리치*3기와 아크리치 1기가 지속적으로 좀비와 구울을 소환하는 게 보였다. 다행히 데스나이트 같은 건 없었으나 이대로는 시간문제였다.
20분 전, 데니얼은 누가 회랑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레인저처럼 예민하지는 못해도 일부 대체할 수 있는 요령은 익혀온 터였다.
데니얼은 유리에게 알렸다.
"한 명이야."
데니얼 곁에서 졸고 있던 유리는 바로 눈을 떴다. 그리고 데니얼 뒤로 가서 케스팅(마법시전) 준비를 했다.
데니얼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곧 문이 열리고 숨을 헐떡이는 기사 한 명이 들어왔다.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겨워보였다.
눈은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 검을 지팡이 삼아 부여잡더니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데니얼과 유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쓰러진 기사의 몸에서 보랏빛이 차오르더니 , 아크리치가 소환되었다. 이후 상황은 앞서서 말했던 것과 같다. 아크리치는 곧 리치 3기를 불러들였고 , 리치들은 또 좀비와 구울을 불러들였다. 그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다.
"저런 거 본적 있어?"데니얼을 물음에 유리는 대답했다.
"미친 , 리치하나 보기도 힘든데 말이라고 해."
던전에는 규칙이 있다. 몬스터는 각자만의 구역이 있고 해당구역의 몬스터가 살아 있는 한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저 병신이 저주를 중첩해서 왔어."
유리는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생각했다. '얼마나 많이 이상한 짓을 하다 온 건지 감도 안 잡히는군.'
지금 현재 상황으로는 승산은 없다. 빨리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리치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해온다면 유리와 데니얼은 한순간에 재가 될 것이다. 다행히 리치들도 예외적인 상황이라 혼선이 있어 순간주저하 든 듯했다.
순간의 판단이 생사를 가른다고 했던가 , 리치가 유리는 보는 순간 유리는 데니얼을 옆에 있는 그림으로 끌어당겼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유리는 욕을 지껄였다.
'젠장'
검은 태양. 액자 밑에 써져 있는 제목을 보는 순간 유리는 암담해졌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제목에서도 그림자체에서도 미사여구가 없었다. 그림은 검은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만 있을 뿐 무엇도 없는 검은 배경이다. 던전안내 책자에서도 강력히 경고한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 중 하나이다. 그것이 왜 그런지 유리는 몰랐다.
'뭐 이제 알게 되겠군.'
그림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은 좋지 않다. 가로세로 높이가 있던 나에서 높이를 제외한 평면으로 압착된 느낌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도 곧 적응하게 된다. 그곳으로 떨어진 사람을 포함 안 모든 인식체들은 이내 그곳에 동화되어 높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높이라는 게 없는 게 아니죠."
유리는 그림 속 남자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아직 그 남자에게 다 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검은 태양이 가까워질수록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나'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는 자신이 한없이 늘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와 미래가 머리의 앞면과 뒷면처럼 붙어 있었다.
남자는 말했다.
"나는 화가였어요."
제인이 경매장에서 블라크의 수첩을 얻은 건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블라크는 입체파의 계보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인이 관심을 보인건 일부 수집가들 사이에서 블라크의 작품이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뭐 갤러리가 유일한 조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 갤러리에서 인정한 적 없는 작품이 그것도 극히 일부 수집가들 사이에서 이렇게 2차 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제인은 그 답이 여기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낡고 오래된 단출한 가죽 표지에 너덜해지 종이에는 검게 때가 탔다.
첫 페이지 한구석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인간의 지식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이미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우주가 있는가?'
"나는 인식에 있어서 특이점을 넘고 싶었어요. 어떤 방식으로 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내가 블랙홀을 그렇게 그렸을 때, 나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왔어요."
남자는 유리와 데니얼을 보면 말을 이어갔다.
"내가 당신들을 발견했는가요? 당신들이 날 발견했는가요?"
-참조할 필요 없는 참조 -
*시대에 따라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으니 , 이름은 개념치 말자.
*Mage: 마법사
*Lich (리치): 언데드 마법사, 불사
** '우주, 지구, 블랙홀 그리고 나'의 일부 축약버전 (쓰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