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지평선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동부전선, 여기 프로이센 일대에 직각으로 꺾인 참호 한쪽에서 베르트랑은 밤하늘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 별이 무수히 흘러 내려온다. 세찬 강처럼 혹은 터져버린 오늘의 뇌수처럼 눈앞에서 강렬한 충격을 주는 장면이었다.
처음 그들이 빳빳이 치켜세워진 죽은 이들의 군복을 받아 입고 올 때였어.
그들은 자긍심이었고 , 의무이자 , 충성심이었지
혹은 어리석은 어린 날의 치기라고 불러도 좋아.
어쨌든 지금 그들은 늘어져버린 죽음 혹은 죽음도 진창에 버린 영혼을 가지고 참호를 굴러 다니고 있어
한 치 앞도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 눈은 1000야드를 앞만 바라보게 되었어. 슬프지 않아?
미치거나 , 미치지 않은 이들을 미치게 했어.
"이봐."
장교인 슐이야. 삐쩍 말라 움푹 파인 눈두덩이에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 안광만은 분명해 보여.
슐은 베르트랑에게 쪽지를 건네.
수식이 가득한 종이.
슐은 밤이 되면 남는 시간을 쪼개어 어떤 특허 관리국 직원이 만든 논문을 뜯어보며, 계산하고 있었어.
그리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베르트랑에게 다가와 알려주곤 했지.
주변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베르트랑이었기 때문이야.
뭐 지적 도피일지, 아닐지는 모르나 누구든 이런 상황이면 초월적인 것을 떠올리게 되지
보통은 '신'이지만 , 이 남자는 우주를 떠올렸어.
우주는 신의 다의어 일지도 모르나 확실히 이 남자 변태인듯해
피 묻은 손과 쌓여가는 시체.
그 속에서 중력과 에너지를 계산해 내며 , 끝없이 펼쳐진 세상에 붉게 타오르는 별들을 상상했어.
"이 의미는 많은 걸 내포하고 있어. 이 걸쓴 당사자도 생각 못했겠지만 말이야."
슐은 하나의 수식을 가리키며 베르트랑에게 설명하기 시작해.
"그리고 여길 넘어가면 결코 돌아올 순 없어. 아마...."
어마어마한 중력장이 펼쳐진 별,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어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야.
그래 너네들처럼
전쟁이 광기에 치닿을 때도 지적 설계가 들어가.
누군가는 대수롭게 말을 하지 '. 여기에 그리고 여기에 기관총을 세우고 킬존을 형성하면 , 다 갈아 버릴 수 있어(인간을). '
그리고 머스터드 가스?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해 , 그런 끔찍함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계산해 넣은 게 인간이야.
효율적으로 인간이란 유기체를 파괴하기 위해 고심한 병참과 그와 연계된 산업인프라들.
광기는 이성을 하수인삼아 차곡차곡 쌓아 올려지고 , 어느 이상이 되면 되돌리기 힘들어.
"그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베르트랑은 조용히 수식을 응시하다 혼잣말하듯이 슐에게 물어.
슐은 생각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검고 검었지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나 봐.
"글쎄 , 평온함? 난 평온함이 있었으면 좋겠어."
베르트랑은 슐의 말에 고개를 떨구며 , 자조적인 미소를 피식 짓고 말아.
아직 해가 뜨지 않았지만 , 나는 알고 있지. 내일이 운명이 날이란 걸.
너희는 시체가 있는 구덩이 속에 있을 것이고 , 거기에 포탄 한 발이 날아들 거야.
순간 시간은 영원한 듯 정지할 것이고 ,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생과 사의 기로에서 한 명은 죽고 , 한 명을 살 테지.
복잡한 정치적 사안, 이해관계들이 얽히고설켜서 한통의 무전, 공격명령이 하달돼.
삐비빅 거리는 단선으로 이어지는 신호음, 이에 갇힌 의미가 이토록 무서울 줄은 몰랐겠지.
간결한 문장으로의 치환되어 전선의 지휘관에게 도달할 때까지 , 그 글자는 아무 감정이 없어.
지휘관 막사 속 장교용 코트와 긴 장화,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이 두 손에 파묻혀있다 드러나.
카바이드램프가 희미하게 탁자를 비추고 , 지휘관은 한 전령이 전달한 명령서를 짓이기듯 주먹으로 내려치지.
참호에는 곧 사다리가 준비돼. 긴장 가득히 병사들은 참호벽에 붙어 누구는 기도를 하고 , 누구는 하늘을 봐.
일제히 야간기습을 명령했으나, 적군이 그걸 알아채고 준비를 해.
누군가는 비상식적인 규칙에 맞춰진 연극 같다고도 생각을 해. 포격, 돌격, 반격, 점령
돌고 도는 이야기가 살 떨리게 지겹다. 정말
베르트랑은 참호 저 끝에서 하사들과 이야기 중인 슐을 보았어.
자신이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죽었고 기억 속에 묻었어.
기억이 묘지로 채워지는 건 끔찍한 일이야. 베르트랑은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지.
하지만 친우의 마지막 모습일까 싶어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어. 그 자신은 공포에 한없이 손을 떨어대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재 말이야.
참호밖에서는 등뒤에서도 총소리가 들려. 반대로 되돌아오는 아군 병사들에게 하사들이 내지르는 경고 같은 거지.
죽음의 공포에 패닉에 이르러도 , 그런 관성에 무조건 앞으로 내 달리게 되어 있어.
무인지대 (No Man's Land)에 이르러서는 조심을 해야 해.
포격으로 파여버린 웅덩이들이 많거든. 그것들은 생각보다 꽤 깊어서 , 정신없이 내달리다 어느새 푹하고 떨어져 버려.
비릿한 시체 썩은 내는 신경 쓰이지도 않아. 익사하지만 않으면 돼. 가끔 공기보다 무거운 독가스가 잔류하고 있긴 한데 그것보다는 포격에 죽을 확률이 커.
달려가는 그들도 적의 참호와 아군의 참호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 몰라. 숲이었는지 , 마을이었는지.
철저하게 다져진 죽음들이 , 폐허와 잎사귀 없는 나무를 만들어 냈고 ,
얼기설기 쓰러져 엉킨 철조망 사이로 인간과 인간의 부분이었을 사채들이 널려져 있었어.
그럼에도 베르트랑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고?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별과 사람.
"어떻게 된 거지." 잠시 정신을 잃었던 베르트랑의 물음에 곁에 있던 슐이 대답을 했어.
"어떻게 된 거긴 , 달려가다 구덩이 속으로 꼬꾸라진 너를 봤고, 나는 너를 구하러 뛰어든 거고."
베르트랑은 웃었어.
"좋네."
슐은 어이없어 물었어
"뭐 저 시체가?"
눈앞에는 철조망에 걸린 시체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거든
베르트랑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어
"아니. 저 별이."
슐도 베르트랑의 어이없는 감상에 웃을 수밖에 없었어
슐은 베르트랑의 말에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지.
구덩이 안에는 온갖 폐허들이 쌓여 있었어. 모든 것이 무너져 있는데 이상하게 '나무문' 하나만큼은 반듯하게 서있었지.
확률이란 건 애매해.
높지 않은 확률이라도 내게는 일어난 일이고 , 확률이 높은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나 버리지.
구덩이를 나가려고 베르트랑과 슐의 머리 위로 당연한 확률로 포탄이 떨어지려고 하고 있었고,
당연하지 않은 확률로 베르트랑의 손에는 나무문의 손잡이기 잡혔어. 아마 경사면을 버둥거리며 나가려다 미끄러지며 잡힌 모양이야.
극도로 활성화된 교감신경계가 모든 순간순간을 느리게 비추고 있었지.
본능인지 직감인지 모를 행동, 베르트랑은 순간 문을 열어 술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어.
나무문이 버틸 것 같지 않은데 , 그래도 다행이다 직사포였으면 보이지도 않았을 건데...
베르트랑의 쓸데없는 상념은 이걸로 끝이었어.
슐 떨어진 곳은 저 멀리 은하계를 넘어서였어.
라운지, 벽면에 보이는 커다란 창 너머로는 광활한 우주공간이 보였고 , 우주선처럼 보이는 이곳은 커다랗게 넘실대는 별을 스쳐 지나고 있었어.
슐은 태양 말고는 별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어. 아니 태양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어.
그때 슐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 을 느꼈어.
순간적으로 경계를 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느낌에 멈칫했지.
그들은 인간과 체형은 비슷했으나 , 키는 몇 배는 되어 보였어.
그들은 에게 말을 건네었지. 실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슐 느낄 수 있게 어떤 조치를 취한듯했어.
자신들은 우주를 떠도는 여행자들 이래.
많은 곳을 방문했었고 , 많은 곳에 있었지만 , 지구를 좋아한데.
왜냐고 , 지구에 사는 인간만이 자신들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
우주는 광활해서 , 다른 곳에 자신과 같은 생명이 있을지도 모르나 ,
아직은 지구밖에 없데.
슐은 생각했어. 이 외계인들도 결국은 자기애밖에 없군
그래서 그 옛날 아직 인간들이 숲을 사랑하고 , 나무를 숭배할 때 그들에게 선물을 남기고 갔었어.
(피라미드 아니야, 그건 인간들이 만든 거래.)
나무, 인간이 편안해할 만한 물질, 별(태양)을 향해 자라고 긴 세월 땅을 지탱하며 , 생명의 계통을 상징하는 것.
언젠가 인간이 경계의 단면을 알 수 있을 때, 직관적으로 열 수 있도록 문의 모양으로 만들었데.
그리고 그 문이 랜덤하게, 그리고 뜬금없이 무작위로 나타나도록 설계하였다는 거야.
슐이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 양자와 상자 속에 든 고양이를 빗대어서 이해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암튼 쥴은 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이 거대한 우주선을 움직이는 검은 별, 그리고 그것이 빛나는 이유, 자신이 문을 통과했던 것은 이것을 통해서였다는 것.
슐은 물었어. 아니 물을 수밖에 없었지. 자신은 전쟁터 한가운데서 여기로 떨어졌으니.
그대들도 전쟁을 하는가?
슐은 그들이 살짝 웃는다고 느꼈어.
그들이 말하길 , 자신들도 똑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나중에 지구의 위대한 과학자가 하게 될 말을 슐에게 들려줬어
"장기적으로 봤을 때, 공격적인 문명은 그들 스스로를 파괴한다. "
그들은 말을 했어. 우리는 오래도록 살았고 항성과 항성사이를 여행해 왔다.
어쩌면 어딘가의 숲 속 혹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아니면 누군가의 지하실에 있을 나무문을 상상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너의 상상대로 있을 거야.